딸은 뉴욕의 플랫 아이언 빌딩 근처에 있는 회사에 다닌다. 뉴욕의 중심가인 맨해튼은 월세가 너무 비싸 지하철로 20분쯤 가야 하는 퀸즈 아스토리아에 산다.
아스토리아는 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에서 이민 온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뉴욕에 거주하는 그리스 사람들이 식재료를 사러 오거나 본토 요리를 먹고 싶을 때 자주 찾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아스토리아에는 그리스 음식점이 많았으며 아담한 정원을 소유한 이쁜 집들이 유독 많았다.
아스토리아는 고층 아파트보다는 푸른 하늘과 구름이 보이는 낮은 건물과 꽃들이 많았다. 빌딩 숲을 이루는 맨해튼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인데 안정적이고 여유로운 느낌이 들었다. 딸의 집 앞에는 24시간 문을 여는 아름다운 꽃집이 있고, 과일과 채소를 파는 가게가 몇 곳이나 붙어있다. 싱싱하고 싼 과일이 각종 채소랑 풍성하게 진열되어 있는 가게를 지나가면 기분이 업 되고 좋아졌다. 여름 과일과 온갖 채소들이 작품처럼 진열되어 있던 그 풍경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기분 좋고 건강해지는 느낌이 든다.
뉴욕은 영화의 중심지다.
길을 가다 보면 누구나 영화 촬영을 하고 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나도 몇 번 보았지만 무슨 영화 촬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스토리아는 과거 할리우드 못지않은 영광을 누렸던 '커프먼 아스토리아 스튜디오(Kaufman Astoria Studios)'의 고향이다. 20세기 초 미국 영화 제작의 본고장이었던 이 곳은 영상 작업이 왕성했던 곳이다. 산업이 할리우드로 옮겨 가면서 30년대 이후로는 독립 영화 제작소로 남았다. 현재는 일부 TV쇼를 이곳에서 촬영하기도 한다.」[뉴욕 중앙일보] 발행 2013/01/11 기사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아스토리아에서도 많은 영화를 촬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딸의 회사를 처음으로 방문하기로 한 날, 집을 나서다 난 깜짝 놀랐다.
영화 촬영차가 작은 아파트 밑에 몇 대나 대기하고 있었다.
그 규모가 너무 커서 영화 내용과 주인공이 보고 싶었지만 약속 시간 때문에 아쉬움을 가득한 채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딸의 집 창문 바로 아래서 영화 촬영이라니......
아스토리아에는 친절한 사람들이 많았다. 카페에서 커피가 맛있다고 하니 주인이 갓 구운 빵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길을 잃었을 때 도움을 요청하면 그냥 가는 사람 없이 누구나 다가와 친절하게 알려줬다.
연인과 어깨동무를 하고 다정하게 걸어오는 젊은 남자가 딸의 신발을 보고 “I love your shoes”하고 환하게 웃으며 지나가기도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옷이나 신발을 보면 솔직한 표현을 하는 뉴요커들이 재미있기도 하고 이해하기 힘들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연인과 함께 있을 때 이런 말 하다간 말다툼의 소지가 생김.)
어느 날 딸이 출근한 후 집 정리를 하다가 아스토리아에 있는 도서관에 가보고 싶었다.
근처 멀지 않은 곳에 도서관이 있다는 정보를 얻고 씩씩하게 집을 나섰다.
도서관으로 가는 길에는 카페도 있고, 꽃들이 핀 주택도 있고, 세탁소도 있고 교회도 있었다. 날씨가 좋아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걸어갔다. 공간 지각력이 다소 떨어지는 나는 계속 주위에 있는 건물을 이정표로 삼아 뇌리에 새겼다. 뉴욕을 출발하기 전 스마트폰으로 지도 어플을 깔고 나름 철저히 준비를 했지만, 낯선 길을 걸으며 스마트폰으로 길을 찾기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드디어 아스토리아에 있는 아담한 도서관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영어로 쓰여진 책들을 읽기는 쉽지 않았지만, 나는 그곳의 사람들과 함께 도서관의 분위기를 느끼며 잠시라도 머물고 싶었다. 자리를 잡고 칼라화보 중심의 책을 뒤적이고 메모하면서, 책 읽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도 보면서 좋은 시간을 가졌다.
혹시 한국 책들도 있냐고 물으니 도우미 할머니께서 활짝 웃으시며 내 손을 잡고 친절하게 데려다주셨다. 아스토리아의 작은 도서관에 한국 책 코너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 책들을 보는 순간 또 한 번 놀랐다. 1970년대 80년대쯤의 활자 작은 누런 종이의 소설책들과 요가와 건강 취미 정도의 책 몇 권이 있었다. 한국 문화에 관심 있는(K-POP이 많이 알려지고 한글을 아는 사람들도 많아진 요즘) 사람들이 한국 책 코너에 와서 어떤 생각을 할까?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내용도, 활자도, 디자인도 우수한 좋은 책들이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친절한 분위기와 색다른 경험을 하게 해 준 도서관을 뒤로하고 오던 길을 거꾸로 걸어갔다.
바겐 세일하는 신발도 사고 건강 음료도 주문해서 마시고 햇살을 받으며 돌아오는 길. 돌고 또 돌고 똑같은 길이 계속 계속 나타났다.
뉴욕의 길 찾기는 쉬워 도보여행이 좋다고 많은 책에는 쓰여 있었지만 그날 내게는 트라우마가 생길 뻔했다.
딸에게 전화하고 경찰관의 도움을 받아 그날 겨우 집으로 돌아온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아스토리아를 생각하면 보헤미안 홀을 빠뜨릴 수 없다.
뉴욕시에서 가장 오래된 비어 가든(Beer Garden)인 보헤미안 홀은 1910년부터 아스토리아에서 영업하고 있다고 한다.
실내에서 또는 탁 트인 나무 아래 야외에서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딸과 함께 보헤미안 홀에 간 날,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하루를 마감하고 좋은 사람들과 맥주 한 잔을 나누며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갑자기 비가 내려 사람들은 안으로 자리를 옮겨갔지만, 우리는 비 내리는 하늘을 보며 가끔 얼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맥주 한 잔의 맛을 음미했다.
100년 가까운 전통만큼 맥주 맛은 진하고 깔끔하고 톡 쏘는 향이 좋았으며 갓 튀겨 따끈하고 바싹한 피시 앤 칩스와 너무 잘 어울렸다.
뉴욕인데도 낮고 예쁜 건물과 작은 도서관과 맛있는 맥주와, 친절한 사람들이 사는 아스토리아가 나는 자꾸 좋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