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
우리는 영화관에서 히어로들의 활약에 즐거워한다. 아이언맨이 사용하는 기술이 시대를 뛰어넘었다고 지적하거나, 히어로들이 왜 거추장스러운 쫄쫄이를 입고 다니는 지도 물어보지 않는다. 그저 재미있게 감상한다. 왜냐하면 그런 요소들은 히어로들의 세계관이라면 당연시되는 합의된 사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기도 전에 어떤 히어로가 어떤 능력을 사용할지를 열심히 학습했기에, 현실적으로는 이상한 장면들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신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일조차도 히어로물의 세계관에서는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문학을 읽으면서는 냉엄한 판사가 되어 등장인물들의 현실성을 따지는 것일까. 왜 히어로들의 복잡한 설정은 빠짐없이 꿰고 있으면서도 문학의 약속된 설정들은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그 탓에 어떤 독자들은 <위대한 개츠비>를 현실의 투철한 도덕정신을 발휘하여 찌질한 졸부의 불륜, 간통 이야기로 읽는다. 웃지 못할 비극이다. 물질만능주의가 횡행했던 소설 속 미국의 시대 배경, 순수한 첫사랑의 기억을 모든 것이 변했음에도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설정을 알았더라면, 적어도 찌질하다는 얘기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테리 이글턴은 이러한 상황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비급을 내놓았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이라는 책은 문학을 읽기 전에 미리 알고 있으면 좋을 설정과 약속들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도입부, 인물, 서사, 해석, 가치라는 큰 틀에서 문학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의 참 본령을 말하고 있다. 각각의 챕터들은 토르의 망치이고, 아이언맨의 슈트이며, 캡틴 아메리카의 비브라늄 방패이다. 그 위력은 세계를 갈라놓을 히어로들의 무기와 다름없다. 문학은 우리가 보아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다가온다.
이글턴의 문학 비평 도구들을 접하고 나면 순식간에 그동안의 문학 읽기가 부끄러워진다. 우리는 한국에 기껏 여행을 왔음에도 인구수가 오천만을 넘어섰으며, 휴전 중인 분단국가라는 사실만을 알고 전쟁이 일어날까 두려워 서둘러 도망가는 바보 같은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형식적인 이론이 싫다고 하면서도 이론적인 부분만을 보아왔던 것이다. 작품을 읽고 느껴지는 것이 있다면 충분하지 않느냐는 소박한 반문은 이제 무력해진다. 사유는커녕 불감증에 시달리고 있음을 고백하는 일이 된다.
한국에 방문한 외국인 친구에게 보여주고 싶은 저마다의 장소가 있듯이, 작가들이 써 내려간 문학 작품도 보여주고 싶은 부분이 각기 다르다. 그리고 그러한 명소들은 사전 상의 정보, 단순 줄거리로는 파악할 수 없는 고유함을 담고 있다. 그것을 전문가들은 문학성이라고 한다. 문학성을 느끼기 위해서는 이론이 아닌 실질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이 분석이 담보되어야 진정한 공감이 가능하고 공감이 가능해야 문학도 가능한 것이다. 저자는 시작부터 분석이 왜 즐거움의 적이 아닌지를 얘기한다. 분석은 일종의 추리다. 탐정이 사건을 수사하듯 작품의 언어에서 발하는 감수성을 추적하게 해준다.
물론 모든 문학작품이 간접적인 화법을 택한 것은 아니다. 김영하 작가는 “작가는 소설에 무언가를 숨겨놓지 않았어요.”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대놓고 보여주는데도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또 반대로 모든 작품이 직설적인 화법으로 말을 걸어오는 것도 아니다. 독자는 작가가 비워놓은, 혹은 완곡하게 표현해놓은 지점에서 또는 호흡을 멈춘 지점에서 다른 메시지를 읽을 수도 있다. 이러한 탐구가 히어로들 간의 싸움에서 누가 이기냐는 지리멸렬한 수준의 논쟁으로 번지지 않으려면 시합의 규칙처럼 적당량의 배경지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한 약간의 공부도 이 책은 빠지지 않고 다루고 있다. 무엇이 책을 좋은 작품으로 만드는가. 그 좋은 부분을 놓치고 넘어가는 독자들을 향한 안타까움과 그것을 알려주고 싶은 열망을 담아 이 책을 권한다.
by. 이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