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과 산책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딩 피플 Nov 18. 2018

역로(驛路)

역로 - 마츠모토 세이초


지금처럼 미세먼지가 창궐하지 않은, 서울이 늘 파란 하늘이던 나의 초등학생 시절에 가장 무서웠던 것은 담임 선생님과 ‘토요 미스터리 극장’이었다. 토요일 밤이면 가족들과 함께 이불을 푹- 뒤집어쓴 채 눈만 내놓고 보던 귀신 이야기가 어찌나 그렇게 무섭던지. ‘귀신이 나오는 장면은 안 봐야지’ 하며 이불로 눈을 가릴 준비를 했지만 항상 귀신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버려서 이불을 손에 꼭 쥔 채로 그 무서운 몰골을 봐야만 했다. 순식간에 지나 간본 귀신의 얼굴이 어찌나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지 ‘토요 미스터리 극장’을 본 날이면 어김없이 악몽을 꾸고는 했다.


놀이기구가 무서운 줄 알면서도 계속 타고 싶은 심리와 비슷하달까, 그럼에도 항상 ‘토요 미스터리 극장’ 때문에 매번 토요일 밤 열한 시가 기다려졌다. 귀신 나오면 얼굴을 가려야지 하면서도 꼭 귀신 나오는 타이밍에 이불을 덮지 못해 귀신을 보고, 또 악몽을 꾸고의 연속.


더 이상 토요일 밤이 기다려지지 않았을 때, 나는 ‘토요 미스터리 극장’에 나오는 귀신의 화장이 옆집 누나의 화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 세상에 때가 조금씩 묻어가고 있었다.


그 이후 내가 다시 TV 프로그램에서 공포를 느낀 것은 ‘토요 미스터리 극장’과 같은 귀신이 나오는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실제상황’ 등 현실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이야기를 다룬 프로그램에서 나는 어렸을 때 귀신이 나오는 프로그램보다 더한 공포를 느꼈다.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친구가 친구를 죽이고.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저럴 수 있을까 싶다가도, 이제껏 인간이 해온 것들을 돌이켜 보면 사람이니까 저럴 수 있겠다 싶은 마음이다.


두 달 전 추리소설을 좋아한다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모임의 이상민 군이 마츠모토 세이초 선생의 단편집을 선물로 줬다. 지난번에 책 정리를 한다며 받은 하루키의 단편집을 무척 재밌게 읽어서 고마웠던 터라 마츠모토 세이초 선생의 단편집 ‘역로’도 기대를 품고 첫 장을 열었다. (이 면을 빌어 이상민 군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옅은 화장을 한 남자’로 시작하는 단편집은 마지막 장인 ‘하얀 어둠’에 이르기까지 ‘역로’는 내게 어렸을 적 귀신에게 느꼈던 공포와 좀 더 자란 후 인간에게 느낀 공포를 다시금 되새기게 했다. 세이초 선생이 짧은 문장으로 마치 빨려 들어갈 듯이 쏟아놓는 기묘한 이야기는 귀신의 짓인 듯하다가도 결국은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드러내며 현실을 자각하게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로’의 재미를 전부 설명할 수 없다.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소설이야 주변에 널려 있다. 마츠모토 세이초의 ‘역로’가 특히 더 재밌는 부분은 인간의 욕망과 보잘것없는 나약한 심신을 소재와 트릭으로 버무려 독자에게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하고 묻는다는 점이다.


이 책에 나오는 단편 ‘역로’는 1960년 8월 일본의 ‘선데이 매일’이라는 잡지에 연재되었고, 지금껏 이야기한 단편집 ‘역로’는 단편 ‘역로’를 표제작으로 하여 1961년 11월 문예춘추 신문사에서 발행했다. 반세기 전의 책이 지금 읽어도 촌스럽기는커녕 인간의 본질을 날카롭게 꿰뚫는 장면을 보여줄 때, 뛰어난 소설가와 시대를 넘어서는 문학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싶다. 인간에 대한 서늘한 통찰을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 이 책을 꼭 추천드린다.




서평<리딩피플/방종민>


매거진의 이전글 찌질한 나에게 소설책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