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법칙
소프트웨어 아키텍처를 설계할 때 ‘Loose Coupling (느슨한 결합)’이라는 개념이 있다.
소프트웨어는 태생적으로 변화를 전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즈니스 규칙이 바뀌고, 많은 요구사항들이 변경되고, 신기술이 끊임없이 나오면서 함께 만드는 사람들조차 계속 바뀐다. 수백 개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시스템이 계속되는 변화를 견디면서 발전하려면, 한 요소에 변경이 일어나도 전체 시스템에 최소한의 영향을 주지 않도록 설계되어야 시스템은 본연의 기능을 지속할 수 있다. 그래서 여러 명의 개발자들이 하나의 시스템 안에 있는 구성 요소들을 빠르게 동시다발적으로 바꾸면서 안정성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구성 요소들 사이에 '서로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라는 계약(인터페이스)만 지키면 시스템이 동작하는데 변화를 주지 않도록 설계한다. 그래서 다른 구성요소의 내부를 상세히 알지 못해도 구성 요소끼리 소통하면서 시스템을 운영하는 데는 문제가 없게 된다.
‘Loose Coupling (느슨한 결합)’은 구성 요소 간의 의존성을 줄이고 구성 요소 간의 동작 규칙은 엄격하게 함으로써 자유롭지만 지속 가능한 관계를 가능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한 요소가 흔들려도 전체가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작은 버그에 시스템 전체가 다운될 일도 없고, 서로가 연결된 상태로 계속 변화를 수용해서 더 나은 시스템으로 확장하고 발전할 수 있게 해 준다.
사람들은 사랑할수록 서로 강하게 연결되고 싶어 한다.
상대의 생각과 감정과 하루가 궁금하고, 나의 모든 것도 이해받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상대의 말 한마디에 마음 전체가 흔들리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울고 웃기를 반복하면서 따뜻한 밀착을 느끼며 "외롭지 않은 상태"를 확인하려고 한다. 하지만 너와 내가 하나라고 여겨지는 순간, 진정한 영혼의 반려자를 찾은 것 같은 안도감과 충만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곧 작은 차이가 가져오는 상대의 다름에도 사랑을 의심하게 되고 불안함과 서운함이 쌓이게 되는 것이다. 서로가 너무 과도하게 영향을 주고받다가 감정이 덩굴처럼 뒤엉켜버려 분리되지 못한 두 마음은 결국, 오래 버티기엔 각자의 균열이 서로에게 너무나도 잘 전달되는 바람에 버틸힘을 잃고 고통스럽게 상대를 떼어내는 이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사이의 관계들에도 '느슨하게 연결된다는 것'이 필요하다.
‘느슨한 결합(Loose Coupled)’은 거리를 두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를 오래 지켜내기 위한 방식이다.
너는 너의 속도로 숨 쉬고 나는 나의 방식으로 움직여도, 서로가 지치지 않고 서로에게 무너지지 않을 거리에서,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닿아 있을 수 있다. 느슨하게 연결된다는 것은 무관심이나 방치가 아니라 오히려 깊은 신뢰다. 서로의 세계를 존중함을 써 내가 모르는 너의 시간에서 너만의 독특한 가치를 향유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고, 서로에게 남기는 느슨함과 여백 안에서 함께 있는 것이 더 편안한 관계다. 언제든 흔들릴 수 있지만, 어떤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는 관계로 서로의 곁에서 오래 남아있을 수 있게 된다.
저마다 계속 다른 방향으로 성장하고 변화하는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 시절 인연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초등학교 때 절친을 어른이 되어 만났을 때, 상대에게 기대했던 건 어린 시절 나의 기억 속의 순수하고 따뜻했던 그 아이였다. 소심했으나 배려심이 깊었고, 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던 눈빛이 맑았던 나의 친구를 우연히 만나 기뻐하면서 어떻게 살았느냐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내가 알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월이 얼마나 지났는데, 그 아이도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와는 다른 일들을 겪으면서 성장해 왔을 텐데 그 시절의 그 아이가 그대로 남아있길 기대했던 건 어쩌면 나의 욕심이었다.
우리의 한 시절마다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건, 변하는 서로를 감내하지 못해서이다. 좋았던 시절 속의 변하지 않는 상대만을 계속 기대한다면, 상대의 성장은 그 관계에 위협이 된다. 서로 조금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도 그 차이가 관계를 흔드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세계를 더 넓히는 과정이 될 때, 우리의 인연은 자연스럽게 길어질 수 있다.
느슨함은 무관심이 아니라 여유이고, 적절한 거리는 단절이 아니라 숨통이며, 작은 틈은 이탈이 아니라 확장을 위한 공간이다. 너의 변화가 나를 위협하지 않고, 나의 성장이 너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 관계에선 두 사람이 각자 더 넓어진 세계를 갖게 될수록 오히려 연결되는 지점이 더 단단해지고 서로의 확장된 세계를 받아들여 더 큰 세계 속에 함께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느슨한 연결은 삶에서도, 사랑에서도, 우정에서도 가장 따뜻하게 오래 남는 연결 방식일 것이다.
시절 인연도 좋겠지만, 좋은 인연이라면 인연의 수명을 길게 만드는 관계의 설계를 통해 좋은 사람을 가장 오래 곁에 두는 인생을 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