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끝나는 곳까지
많은 노래들이, 사랑을 하고 난 이후엔 다르게 들렸다.
절대 존재하지 않을, 파도가 끝나는 곳까지 같이 가자고 말하는 이 노래는 그중 하나였다.
영원을 낙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잘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사람은 언젠간 죽는다는 걸 깨닫는 순간들이 있다. 매년 생일이란 걸 챙기며 탄생을 기념했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그 반대인 소멸에 대해서는 비교적 늦게 의식하게 되는 것 같다. 소멸을 인지하는 것은, 동시에 영원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언젠간 내가 사랑하는 엄마가 죽고, 함께 마당을 뛰어노는 강아지도 죽고, 나 자신도 죽을 것이라는 걸 깨닫는 어린 아이는 그와 동시에 영원에서 멀어진다. 영원을 부정하거나, 혹은 영원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다.
처음으로 죽음을 인지했던 그 순간부터 얼마간, 나는 ‘끝’을 생각하면 눈을 질끈 감아버리곤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는 죽음을 생각하더라도 눈을 감지 않고 견딜 수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그에 대해 달가웠던 적이 없다. 그랬기에 영원이란 건 고려조차 한 적이 없다. 권지용의 말마따나 영원한 건 절대 없다고 생각했으며, 영생을 꿈꾸며 수은을 마시다가 납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진시황의 죽음이 어이없다고만 생각했다.
그랬기에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대신에, 끝에 대해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다. 뭔가 중대한 것들이 시작되는 순간, 그저 현재에 충실하자는 핑계로 그 끝을 외면했다. 장난스럽게 오고가는 친구들의 ‘우리 영원하자!’라는 말에 대해서도 전혀 가볍게 넘기지 못하고 작은 회의를 가졌을 뿐이다.
난 그렇게 생각했다. 영생과 불로장생을 꿈꾼다는 누군가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의 이야기는 제법 신선했다. 내가 지금껏 생각해왔던 것은 전혀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가능’한 것만을 꿈꾸지는 않는다. 인류의 대전제가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이더라도, 그 대전제에 위반하는 걸 꿈꾸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 어마어마하고도 아무것도 아닌 사실을, 나는 나의 사랑 덕분에 깨달았다.
첫사랑을 시작할 때, 나는 그 사랑의 끝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탄생이라는 축복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생각조차 못했던 어린 아이처럼, ‘끝’에 대해 무지했다. 어린 아이와의 차이가 있다면, 어쩌면 끝이라는 것을 외면했다는 점일지도 모르겠다. 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사랑이, 어떻게 끝나게 될 것인지 –그것이 희극이든 비극이든- 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이기에, 어쨌든 고려할 건 아니며 그냥 현실에 충실하자는 합리화였던 듯하다.
그러던 도중, 나의 첫사랑이 했던 말이 있다. 첫사랑이 끝사랑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다는 말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그 사람이 나와 끝까지 함께 하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늘 외면해왔던 그 끝을, 그 사람은 늘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알기론 참 현실적이고 똑똑한 사람이 영생을 꿈꾼다. 그리고 동시에, 나와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 순간 난 영원을 믿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영원이란 게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게 되어버렸다.
‘파도가 끝나는 곳까지’라는 노래를 들었을 때, 가장 처음 떠올랐던 단어는 영원이었다. 누가 들어도, 영원하자는 말을 그저 파도가 끝나는 곳까지 가자는 은유로 포장했을 뿐인 곡이었다. 영원에 낙관적이지 못했던 나는, 어떻게 하면 영원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제법 있었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꿈을 꿀까 싶었던 것이다.
노래 안에서, 화자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변화한다. 거친 파도가 갑자기 다가오기도 하고, 어둠이 찾아오기도 한다. 간혹 잔잔한 날도 있는 반면, 일렁이는 날도 없지는 않다. 이처럼 변수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유일한 상수는 ‘너’ 한 사람뿐이다. 모든 게 다 망가지고 많은 것들이 끊임없이 변해가도, 절대 ‘너’만은 잃고 싶지 않기에 감히 외친다. 파도가 끝나는 곳까지 함께 가자고. '너'가 있기에 화자는 그 무한한 변수들을 다 견뎌낼 수 있다.
사랑을 하고 난 후, 우리 나름대로 영원해보고 싶어진 후에야, 화자의 마음을 조금은 깨닫게 되었다. 영원에 대한 갈망은, 무지한 고집이 아니며, 현실과 저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다. 다만 잃고 싶지 않은 게 생기는 순간 우린 그 누구보다도 보수적으로 영원을 바라게 된다. 오히려 역설적이게도, 영원은 되려 가장 현실적인 개념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같은 수준이더라도 얻는 효용보다 잃는 비용을 더 크게 생각한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가장 현실성 있는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잃고 싶지 않다는 것이 곧 영원이라고 볼 수 있다면, 영원은 세상에서 가장 현실적인 용어가 된다.
동시에, 무조건적으로 있기 마련인 '끝'이라는 것이, '영원할 수 없음'을 절대적으로 의미하지는 못한다. 언젠가는 모두가 죽기 때문에 영원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린 마음은 내팽개치기로 했다. 어쩌면 두 가지는 전혀 상관 없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영원하고 싶다는 마음은 무언가를 꼭 붙들고 있고 싶다는 갈망과 많이 닮아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꽤나 벅찬 일이다. 어쩌면 하잘 것 없을 이 세상에, 사르트르 말마따나 자의와는 크게 상관없이 어쩌다 던져진 주제에, 무언가를 잃고 싶지 않아서 간절할 수 있다니 말이다. 지금도 어떤 이들은 서로를 곁에서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에, 영원을 속삭이고 있을 것이다.
끝으로 나의 사랑에게 말하고 싶다. 영원을 꿈꾸어보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영원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러니 함께 영원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