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멜랑콜리아>
당신은 필연을 믿나요?
나는 필연을 믿는다. 물론 무슨 운명론이나 신의 뜻 같은 것을 믿는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단지 죽음을 믿는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죽음은 필연적으로 나를 찾아올 것이라고. 또한 죽음 이후에는 필연적으로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절대적인 죽음 앞에서는 그 어느 것도, 나 자신이 부여한 의미 외에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원래부터’ 혹은 ‘근본적인’ 이라 불리는 의미들은 죽음의 필연 앞에서 한없이 공허해진다.
한편 필연을 믿는다는 것은 곧 어찌할 수 없는 것의 존재를 믿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세상에는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나의 죽음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의 죽음부터가 그렇다. 타인은 물론이고 나 자신의 마음조차 어찌할 수 없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바라지 않던 일이 일어나고, 다 잘 될 것 같은 상황이 꼬여버린다. 공든 탑은 어이없게 무너지고, 스스로를 아무리 도와도 하늘의 대답 따위는 돌아오지 않는다.
물론 ‘어찌할 수 없는 일’은 ‘반드시 일어나는 일’과 약간 다른 말이기는 하다. 내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두고 필연이라 부르는 건 조금 이상하니까. 그렇기에 어찌할 수 없는 일과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 완벽하게 일치한다면 이는 더욱 절망적일 수 있다. 마치 피할 수 없는 지구의 멸망처럼.
영화 < 멜랑콜리아(Melancholia) >는 두 종류의 필연을 다룬다. 하나는 어찌할 수 없는 우울이고, 다른 하나는 어찌할 수 없는 멸망이다. 이 두 필연은 영화의 서로 다른 두 파트와 각 파트의 중심이 되는 서로 다른 두 인물을 통해 효과적으로 묘사된다. 서로 대조되고 충돌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두 필연에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죽음이다. 우울과 멸망이 죽음을 둘러싸고 추는 춤으로 영화는 채워진다. 절망적이고 낭만적인 춤이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지극히 간단하다. 스포일러랄 것도 없다. 영화는 두 파트로 구성되는데, 1부는 저스틴(커스틴 던스트)의 결혼식을, 2부는 행성 멜랑콜리아와의 충돌로 인한 지구의 멸망을 다룬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장소도 시간도 굉장히 한정적이다. 이처럼 지나치게 단순한 줄거리와 설정 덕분에 인물의 내면이 세밀하게 드러나게 된다. 두 파트의 제목이 두 사람의 이름으로 된 만큼, 이 영화는 저스틴과 그의 언니 클레어(샤를로뜨 갱스부르)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 지구가 멸망하기는 하지만 절대 통상의 재난영화라 할 수는 없고, 행성과 우주가 나오지만 절대 sf영화도 아닌, 이 기이하고 아름다운 영화를 지금부터 만나보자.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용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 영화가 얼마나 아름답고 매혹적인지를 먼저 말해두고 싶다. 가장 먼저 짚고 싶은 점은 음악이다. 배경음악이 어마어마한 비중을 차지하는 영화인데, 더욱 놀라운 점은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하나의 곡만이 나온다는 것이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 원래도 굉장히 느리고 무거운 곡인데 영화에 입혀지니 비극적이고 낭만적인 색채가 더욱 짙어진다. 직접 영화를 보면 이 곡이 왜 이 영화에 없어서는 안 되는지, 또 이 곡이 아닌 다른 곡은 왜 이 영화에 개입될 수 없는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시각적 미(美) 또한 훌륭하다. 오프닝 장면은 아무것도 모르고 봐도 그 아름다움에 압도될 정도로 자체의 영상미가 훌륭하다. 행성 멜랑콜리아도 지구를 멸망시킨다는 끔찍한 사실이 망각될 정도로 숨 막힐 듯이 아름답다. 시골 속의 대저택이라는 배경도 영상미에 한 몫 한다. 뿐만 아니라 영화 포스터에도 차용된 존 에버렛의 “오필리아”를 비롯해 몇 개의 그림들이 등장하며 영화에 시각적 미감을 더한다.
또 하나 짚고 싶은 점은 영화의 속도이다. 의도적인 슬로우모션을 사용한 건 오프닝장면 뿐이지만, 왠지 모르게 영화 전반적으로 서사를 질질 끄는 느낌이 든다. 주인공도 그들을 보는 관객도 모두 진창을 걸어가는 기분인데, 게다가 끝은 결국 깊은 수렁뿐이라는 것을 알고서 걷는 진창이다. 영화 속에서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나지만 결국 결말은 예상대로, 결혼은 파기되고 지구는 멸망한다. 이를 보면 이 영화는 결말보다도 그 결말에 도달하는 진창과도 같은 과정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청각적으로도 시각적으로도 매우 아름다운 이 영화의 예술성은 그 내용에서 완성된다. 이제 본격적으로 멜랑콜리아를 살펴보며, 필연, 우울과 멸망, 그리고 죽음 속으로 침전해보자.
이 글에서는 역순으로 2부를 먼저 다루고자 한다. 2부에서는 지구의 멸망 앞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여러 반응과 태도를 볼 수 있다. 가장 전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클레어이다. 그는 행성충돌을 애써 부정하려 하지만 한편 끊임없는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그러다가 그토록 부정하던 행성충돌이 점점 사실로 다가오자 극도의 혼란과 절망에 빠지고, 그럼에도 끝까지 미련을 놓지 못해 최후의 순간까지 발버둥친다. 겁도 미련도 많은 클레어와는 반대로 그의 남편 존은 시종일관 행성이 충돌하지 않을 것이라며 강한 확신을 보인다. 그러나 제일 강인해보였던 그는 정작 자신의 믿음이 부서지자 그 누구보다도 먼저 무너져버린다.
한편 클레어의 동생인 저스틴은 우울증 환자이다. 영화의 중후반부까지 저스틴은 언니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가장 나약하고 무기력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구의 멸망 앞에서는 가장 강하고 의연한 사람이 된다. 감독이 영화의 아이디어를 얻은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기도 한데, 우울증 환자는 다른 사람에 비해 삶에 대한 기대가 낮고 무기력하기 때문에 오히려 극한의 상황 앞에서 훨씬 차분한 태도를 보인다고 한다. 어쩌면 행성이라도 충돌해서 모두 죽어버리는 상황이 저스틴에게는 오히려 반가웠을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고나서 가장 먼저 들었던 의문은, 영화의 절반 분량을 왜 하필 결혼식에 썼는지였다. 1부는 오직 저스틴의 결혼식이 치러지는 하룻밤만을 보여준다. 그것도 저스틴의 우울증으로 인해 점점 안 좋은 방향으로 꼬여만 가는 결혼식이다. 지구 멸망 앞에서, 왜 하필 관객은 이런 이상한 결혼식을 보아야 하는 것인가?
아마 결혼식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행위라서 그랬을 것이다. 사랑을 하고 가족을 이루는 것 자체는 자연적인 행위일 수 있지만, ‘결혼식’이라는 특정 형태의 예식을 치르는 것은 인간만의 특징일 것이다. 그것도 보통 성대한 결혼식이 아니다. 18홀 골프장이 있는 시골의 거대 저택에, 수많은 하객을 불러 놓고, 극진한 대접과 밤새도록 끊이지 않는 파티를 제공한다. 결혼식은 자연적인 본능과 감정을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포장한 결과물이자, 자연을 정복한 인간 문명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웃음과 음악과 음식이 끊이지 않는 인간들의 결혼식과, 절대 고요의 우주로부터 모든 의미와 가치를 배제한 채 서서히 다가오는 자연물 행성은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한편 이 결혼식은 엄청난 부조리를 갖고 있기도 한데, 바로 행복이 강요된다는 것이다. 결혼식이란 당사자인 신랑 신부는 당연히 행복해야 하고, 하객들도 다 함께 기뻐하고 축복해야 한다는 전제가 은연중에 깔려 있는 의식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자꾸 저스틴에게 행복할 것을 요구하고,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그에게 결혼식을 망쳤다며 비난과 멸시를 던진다. 심지어 결혼 상대자인 마이클마저 저스틴의 우울증을 모르고 단지 ‘기분이 안 좋은 것’ 정도로 생각하는데, 이는 저스틴이 약혼자에게조차 자신의 우울증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을 숨기고, 행복을 가장하고, 축복을 연기하는 이 결혼식은 너무나도 인위적이고 가식적이다. 결국 이 가식을 버티지 못한 저스틴의 거대한 우울로 의해 결혼은 산산조각난다.
심리묘사가 훌륭한 영화인만큼 이 글에서도 저스틴과 클레어의 마음 분석을 시도해보려 한다. 조금은 도식적인 분석이 될 수 있지만, 그만큼 이 두 인물은 극적으로 대조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 인물 모두 우리 내면에 공존하는 서로 다른 두 마음이기도 하다.
저스틴은 우울증에 의해 내면이 이미 무너질대로 무너져 지구의 멸망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그는 지구의 멸망에 애써 침착한 것이 아니라, 지구 ‘쯤은’ 멸망해버려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내면의 우울이 거대한 것이다. 우울에 잠식되어 무엇을 하려는 힘도 의지도 없는 저스틴이 비교적 정적인 인물이라면, 클레어는 닥쳐오는 끔찍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분투하는 다소 동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행성과 지구 멸망이라는 외부의 위협은 클레어의 마음에 극심한 동요를 불러일으킨다. 불안에서 절망으로, 절망에서 절박한 미련으로, 미련에서 극도의 공포와 슬픔으로 변화하는 클레어의 내면은 그로 하여금 행성이 지구를 덮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비명을 지르고 발버둥치게 만든다.
조금 더 깊이 파보자면, 클레어는 보존에 대한 욕구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 자식과 가족을 지키고, 삶의 터전인 이 지구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에게 미련과 절박함을 갖게 한 것이다. 반면 저스틴은 파괴에 대한 욕구를 갖고 있다. 우울증 환자들이 종종 “죽고 싶다”고 말하듯이, 자신을 파괴하고 세상도 파괴되면 좋겠다는 마음인 것이다. 자신도 우울증을 앓았던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마음을 대변하는 저스틴의 대사에서 이런 파괴 욕구를 잘 읽을 수 있다.
지구는 사악해.
그러니 애석해 할 필요 없어.
없어져도 아쉬울 것 없어.
더 나아가 조금 추상적으로도 생각해보자면, 클레어와 저스틴은 각각 유(有)와 무(無)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1부의 부조리 가득한 결혼식 준비를 한 사람은 바로 클레어였다. 동생을 위해 정성껏 준비한 결혼식은 그러나 거짓 감정과 허례허식으로 치장된 가짜일 뿐이었다. 한편 2부에서는 저스틴이 행성 멜랑콜리아와 동일시되는 것 같은 장면들을 볼 수 있는데,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은 저스틴의 우울한 욕망이 멜랑콜리아에 투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에는 저스틴의 바람대로 멜랑콜리아에 의해 모든 것이 소멸해버리지만, 사실 결혼식이 진행되던 시점에도 이미 멜랑콜리아는 다가오고 있었다. 지구의 필연적인 종말 앞에서 결혼식은 아무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 저스틴이 바로 이런 무의미를 나타낸다면, 클레어는 이 절대적인 무의미 위에 인간으로서 무언가를 만들고 쌓아올리는 유의미를 나타낸다.
가장 사실적이고 진실한 것은 멜랑콜리아에 의한 멸망뿐이었고, 결혼식과 행복은 모두 가짜였다. 이런 의미에서 클레어가 허구적인 유(有)에 집착한 반면 저스틴은 자신의 우울증을 통해 단 하나의 진실인 무(無)을 꿰뚫어 봤다는, 다소 심오한 해석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스틴은 무의미에 굴복되어 체념조차 하지 못한 가장 나약한 인간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그에 비해 클레어는, 비록 이 세상의 근본적인 무의미가 자신을 집어삼킬 듯이 거대하고 절대적이어도, 끝까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강인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인간 입장에서 멜랑콜리아는 거대한 공포이고, 잔인하고 냉혹한 운명이며, 모든 것을 파괴시키는 재앙이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자연은 무심하다. 멜랑콜리아는 아무런 이유도 의미도 찾을 수 없는 필연적인 무의미 자체였다. 필연은, 멜랑콜리아가 그랬듯이, 우울하고 차가운 푸른빛을 띠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절대적인 죽음 앞에서 저스틴과 레오(클레어의 어린 아들)는 ‘마법의 동굴’을 만든다. 길고 굵은 나뭇가지를 모아, 정성스럽게 하나씩 단도로 다듬어 동굴을 만든다. 그 엉성한 나무 동굴 안에서 세 사람은 멜랑콜리아를 맞이한다. 납득하기 힘든 기괴한 최후의 순간이다. 모든 것의 의미를 박탈하는 죽음 앞에서 그들은 자기만의 마법의 동굴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한 게 아닐까. 비록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시 말해 ‘필연적으로’, 머지않아 죽음은 도래하고 그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내용참고
이동진, 김중혁의 영화당 #99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우울의 바닥을 치는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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