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회 페미니즘 연극제, 연극 “이방연애” 프리뷰
페미니스트이자 이성애자로서,
이 사회에서 연애하기란 상당히 피곤한 일인 것 같다.
나는 생물학적으로 여성이지만, 스스로 여성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인식하면서 사는 사람은 아니다. 어릴 적부터 학창시절까지 내게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비교적 옅은 편이었다. 여자니까 어때야 한다든가, 여자는 원래 어떻다든가 하는 식의 말은 들어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리고 나 자신도 나를 한 여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만 대했다.
더군다나 나는 스스로를 소수자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나는 강했고, 힘이 셌고, 대부분의 경우 내가 속한 집단의 중심에 있었다. 나는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것은 나보다 훨씬 윗세대의 이야기, 혹은 어느 막장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머지않아 깨달았다. 불평등은 생각보다 가깝고, 차별은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안타깝고 믿기 싫지만 우리세대에도 여전히 성차별은 만연하다는 것을. 그리고 눈에 보이는 폭력적인 언행만 차별에 해당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슬프게도 나는 연애를 통해 성차별을 접했다. 대학에 와서 본격적인 연애를 시작하며 가졌던 나의 기대감은 이내 실망으로, 그리고 거부감으로 바뀌었다. 나에게 연애는 성 역할의 족쇄였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심지어 연애 상대에게서도 무례하고 차별적인 언사들이 끊이지 않았다.
‘네가 여자라서 그러는 거야. 남자들은 달라.’
‘넌 여자답지 않게 왜 이렇게 무심하냐.’
‘나 만날 때 왜 화장 안 해? 좀 섭섭한데.’
‘여자는 남자 만날 때 밥 사는 거 아니야.’
‘여자는 내숭도 좀 떨고, 남자친구한테 애교도 부릴 줄 알아야지’
‘네가 왜 남자친구 집까지 데려다주니? 역할이 바뀌었네.’
모두 직접 들은 말이다.
나는 이것들을 감히 폭력이라 부르겠다.
그 뒤로 한동안 연애가 싫어졌다. 유독 연애 관계에선 내가 나로서가 아니라 여자로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예쁘다, 귀엽다, 사랑스럽다 등 연인의 애정표현조차 혐오스럽기도 했다. 돌아보면 다소 지나친 반응 같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그러한 말들조차 나를 가두고 억누르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나를 나다움이 아닌 여성성으로 규정하는 연애에는, 아니 그러한 모든 관계에는 반대한다.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그리고 갖고 싶지도 않은 여성성을 강요하는 것에 반대한다.
오늘날 철저히 개인 간의 관계라고 생각되는 연애는, 사실 지극히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현상 중 하나이다. 우리 연애의 많은 부분은 미디어와 사회 인식에 의해 규정되고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회의 연애문화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상당히 아니꼽다. 상대의 동의를 얻지 않은 기습 키스나 스킨십 등 명백한 폭력이 ‘박력 넘치는’, ‘설레는’ 따위의 말로 포장된다. 싫다는 의사표시가 한 번 튕겨보는 것쯤으로 이해되고, 현행법상 처벌 대상인 스토킹이 애절한 짝사랑이라고 해석된다. 살갑고 애교 많은 여성과 그를 지켜주는 듬직하고 강한 남성의 이미지는 연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양산한다. 이곳의 연애문화는 많은 면에서 나와 맞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들의 연애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이방연애'는 10대부터 40대까지 비교적 다양한 연령대 퀴어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여성'인 동시에 '퀴어'는 이 사회에서 변방 중 변방에 속해있는 이방인이다.
'여성의 신체를 가지고 태어나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듯한 '이방연애'는 소수자(퀴어)가 조금 더 넓은 범위를 포괄하는 소수자(여성)에게 자신들의 위치와 존재를 증언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 연극 “이방연애” 리뷰, 문화뉴스x서울프린지
지난 달 20일부터 약 한 달 간 국내 최초의 페미니즘 연극제가 열린다. 참가작 중 한 편을 이미 보고 왔고, 좋은 기회를 얻어 한 편을 더 보러 가게 되었다. 이번 작품은 바로 “이방연애”, 7월 19일부터 29일까지 대학로 달빛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방연애”는 세 명의 퀴어 여성 예술가들이 들려주는 자신의 연애 이야기를 담았다.
이 극을 보고자 한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동기는 지지와 응원이라 할 수 있겠다. 한 명의 페미니스트로서, 퀴어 친구들을 둔 사람으로서, 그들과 나의 정체성이 억압받지 않기를 소망하는 사람으로서. 긴 시간의 억압을 뚫고 이제야 힘든 첫 발을 딛은 페미니즘 연극제를 반기는 마음이랄까. 또한 나는 퀴어의 연애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들에게도 이성연애의 문화에서처럼 성 역할이 은밀하게 혹은 대놓고 강요되는지,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어떤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하는지. 사실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어 세상에 나왔다”고 말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자, 세상이 하나의 집이라고 생각해봐요.
따로 또 같이 사람들은 어떤 방에 들어가 있겠죠.
근데 저는요, 방이 아니라 방과 방 사이,
문지방 같은데 누워 있는 기분이었어요. 줄곧.
- “이방연애” 대사 中
그러나 퀴어 연애가 나의 연애와 다른 점 하나가 있다면, 그들의 연애에는 이방인의 감정이 끼어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이곳의 이방인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그들이 수적으로 소수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국회의원도 귀족도 수적으로 소수 아니던가. 퀴어들이 방 안에 들지 못하고 문지방에 걸쳐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사회가 그들을 방 밖으로 몰아냈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대놓고 동성애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극단적인 사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피해를 주지 않으니까 괜찮아’, ‘내 주변사람만 아니면 괜찮아’ 식의 어설픈 생각들도 모두 퀴어 혐오요, 차별이다. 그들은 외계인도 아니고, 동물원 속 동물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다. 이건 정말 사실만을 말하는 건데, 그들은 그저 나의 친구이자 한 사람일 뿐이다.
나는 이성애자 대 동성애자, 혹은 페미니스트 대 페미니스트가 아닌, 그저 사람 대 사람으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모든 차별과 혐오는 집단화에서 나온다. 집단화란 한 사람을 개인 대 개인으로 마주하지 않고, 그가 속한 특정 집단으로 묶어버리는 사고방식이다. 예컨대 최근 페미니즘 논의를 부상시킨 여성 혐오. 이는 한 사람이 가진 다양한 정체성과 그만의 고유함을 깡그리 무시한 채 오직 그가 속한 ‘여성’이라는 범주만을 두고 그를 대상화하는 사고이다. 남성 혐오나 퀴어 혐오 역시 마찬가지이며, 나아가 장애인 혐오나 외국인 혐오 등 모든 혐오가 이러한 집단화에서 기인한다. 하나의 범주 혹은 집단만으로 사람을 보게 되면, 자연스레 그 사람만의 고유함은 지워진다.
나는 사람의 고유함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이 모든 집단화와 혐오에 반대한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다.
모든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에는 잘 납득이 안 되었다. 어째서 모든 사람이, 아니 남성마저 여성을 위한 이념을 따라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후 내가 겪은 페미니즘은 비단 여성만을 위한 이념이 아니었다. 페미니즘은 집단으로 규정됨으로써 자신의 고유함을 억압받는 모든 여성과 남성, 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차별받는 퀴어나 장애인 등 모든 이방인을 위한 이념이다. 그러한 이념이 되어야 한다. 이번 페미니즘 연극제가 단지 여권 신장만을 외치거나 여성 우월주의를 표방하지 않고, 장애인과 퀴어 등 소수자의 이야기까지 담은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의 맺음말은 이번 연극제를 주최한 페미시어터의 소개글로 대신하고자 한다. 나를 포함한 모든 페미니스트와 그들의 연애를 언제나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페미씨어터는 ‘페미니즘 연극제 운영’과 ‘페미니즘 연극 제작’을 목적으로 설립됐다. 페미니즘 이슈가 사회를 휩쓸면서 페미니즘이 ‘여성우월주의’라거나 ‘남혐’이라는 등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도 늘고 있다. 그러나 페미씨어터가 바라보는 페미니즘의 목표는 궁극적인 성평등이다. 젠더위계의 하위에 여성이 위치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사회분위기를 바꾸고, 존재조차 지워졌던 성소수자와 함께하는 것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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