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_오리올(Oriole) (서울 해방촌)
비 온 다음날은 하늘이 맑고 기온이 떨어진다. 이 무미건조한 과학적 사실이 내게 주는 감동은 과학 용어로 다 설명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전날 비가 온 뒤 새파래진 하늘 아래 한강도 푸른빛으로 짙어진 3월 어느 금요일이었다. 이런 날은 어디로든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라는 생각에 해방촌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버스에서 좀 일찍 내려 해방촌 초입부터 걸었다. 가파른 해방촌 골목을 오르다 보면 쌀쌀한 날씨에도 땀이 나고 숨이 가빠오지만, 점점 하늘과 가까워지는 기분을 온 몸으로 느끼고 싶어 굳이 걷는다.
한참을 숨이 찰 때까지 올라가다가, 남산에 가까워 조금 내려가면 보이는 카페다. 남산 바로 밑이자 해방촌 꼭대기에 있는 이곳은 가수 정엽이 운영하는 곳, 전망이 좋은 곳 등등으로 알려져 있다. 걷다가 보이는 카페에 즉흥적으로 들어가는 게 일상인 나에게 인터넷에서 본 카페를 찾아간 건 조금 의외의 일이었다. 맥주가 생각나던 밤에 ‘해방촌 혼술’을 검색하다가 이곳도 발견한 것인데, 밤에는 술과 안주도 파는 곳이라서 소개가 된 듯하다. 1층은 카페, 2층은 바, 3층은 루프탑으로 꾸며 놓았다. 그리고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처럼 나의 목적 역시 이 루프탑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기만 한 하늘 아래, 아름답진 않지만 가식적이지도 않은 해방촌 정경이 펼쳐진다. 쏟아지는 뜨거운 햇살과 아직 찬기가 가시지 않은 바람이 부딪혀 감각에 모순을 일으키는 것만 같다. 하얀 테라스의자가 벽돌바닥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 옆에 놓인 널따란 나무 평상을 선택했다.
나는 신발을 벗는 것을 좋아한다. 발이 해방되는 기분이랄까. 신발을 벗고 평상 위로 올라가본다. 이런 햇살을 받으며 가만히 앉아있는 게 도대체 얼마만인지. 초등학교 이후로 한참 잊고 있던 운동장 위의 오후 햇살을 되돌려 받는 기분이다.
굳이 무얼 하지 않아도 되는 이 공간이 좋았다. 무언가를 하고 안하고는 나에게 달려있겠지만 어떤 때에는 공간이 정해주는 문제이기도 하다. 날씨와 함께 멍 때린다. 달지 않게 만들어 달라 부탁했던 밀크티는 적당히 연하고 적당히 시원했다.
해방촌은 사실 그 이름과 다르게 해방적이거나 활기찬 그런 역사를 갖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치열하고 처절한 삶의 현장이었을 것이다. 해방촌이라는 이름도 해방 후 월남한 사람들과 전쟁 피난민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들었다. 이곳에서 커피를 시켜 마시고 있는 나로서는 알 수 없을 가난, 그 아픔을 딛고 있는 동네 해방촌.
그런 해방촌은 이제 그 이름처럼 ‘해방적인’ 동네로 변모하는 중이다. 오리올 같이 분위기 있고 개성 있는 카페들, 작지만 사람들이 북적대는 독립 서점들, 개인 공방이나 작업실들이 하나둘 씩 생기더니 어느새 이 동네를 꽤 많이 채웠다. 하늘과 맞닿은 이곳에 예술이 스며들고 있다. 예술과 하늘의 파랑 모두를 동경하는 나는 앞으로도 이곳을 자주 찾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