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카페첩

공간을 공간으로 대우하는 법

③_Laundry Project (서울 해방촌)

by 해랑

버스 정류장으로 가던 중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다. 생각이 스친다. 이런 날 고작 수업 한 개 들으러 왕복 두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대로 학교 반대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잡아탄다. 세 개도 두 개도 아닌 한 개의 수업은 땡땡이의 쾌감을 즐기기에 부담 없이 딱 적당하다고 생각하면서.





사람 발길이 많이 닿는 해방촌 초입과 해방촌 오거리를 잇는 한적한 오르막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딱히 특이할 것도 없는 외관이 왠지 모르게 시선을 잡아, 카페공간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구석이 있다. 나도 예전에 걷다가 지나치듯 본 걸 기억해 찾아왔다. 정오의 햇살을 받으며 야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살짝 부러웠다.


LRM_EXPORT_20180413_080453.jpg Laundry Project의 자몽에이드


시그니처라는 자몽에이드시켰다. 자몽 하나를 그대로 짜 넣기 때문거의 자몽 80에 탄산 20일 거라 했는데, 놀랍게도 정말 그랬다. 빨대 속으로 자몽 과육이 가득히 들어온다. 청량한 과일 하나를 그대로를 마시는 것 같다. 6500원이란 가격이 아깝지 않다.


음료만 시켰는데 작고 하얀 자기그릇에 seasalt 초콜릿을 담아 함께 내주신다. 이 작은 초콜릿은 내 마음 안서 차지하는 크기도 그리 크진 않지만 돌이켜보면 이 초콜릿 하나 때문에 내가 아끼게 된 카페들이 몇 군데 있다. 작은 친절은 무의식으로 스민다.




잠시 에이드를 마시다가 노트북을고 작업을 시작한다. 무겁고 어두운 광기를 다루는 한 극에 대해 한참을 몰입해서 쓴다. 눈이 아파와 잠시 고개를 들어보니 언제부턴가 오후 햇살과 사람들의 재잘거림과 한낮의 여유가 이곳을 메웠다. 내 노트북 안과는 완전 딴세상이다.


문득 카페에서 작업을 하는 건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업에 몰두하는 동안 인테리어의 디테일도, 잔잔히 흘러나오는 재즈 선율도, 조금씩 움직이는 햇살도 다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어떤 카페는 그 자체로 음미할만한 공간으로서 대우받아야 함을 생각한다. 작은 소품 하나하나에도 놓치면 아쉬울 매력이 있는 이런 공간이 그에 해당한다.


우리의 문학적 상식은 공간은 배경이라고 한다. 여행이 아니고서야 굳이 지금 있는 공간이 어떤지 신경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보다는 그 공간에서 무얼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가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 같다. 하긴 요즘은 여행가서도 공간이 아니라 공간에 대한 사진을 남기는 일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공간 자체를 사고의 주인공으로 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카페를 좋아한다는 나에게도 무의식중에 카페는 배경에만 머물렀다. 대체로 주인공은 내 노트북 안의 작업이나 공부 아니면 독서였다. 그럴 거면 왜 굳이 카페를 가냐 집에서 하지 돈 아깝게, 라는 핀잔도 일리가 있다. 작업에 집중하는 순간에는 그 장소가 이 카페이든, 스타벅스나 할리스이든, 아니면 내 방이든 사실 크게 상관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카페에 가야만 작업을 시작할 수 있는 최소한도의 집중력이 생긴다는 핑계로 집 밖을 나가고는 한다. 하지만 때때로 이렇게 세상에 둘도 없을 것 같은 공간을 만나면 다른 활동의 배경으로 소모되기에는 이 공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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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잠시 노트북 속 세상에서 빠져나와 지금 내가 있는 공간을 찬찬히 음미해봤다. 따사롭던 정오의 햇살이 어느 새 뜨거워져 있다. 의자에는 각양각색의 빛바랜 작은 방석이 놓여 있고, 테이블 위로는 다소 무심하게 생긴 전등이 달려있다. 햇빛도 있는데 이렇게 밝은 전등은 꺼도 되지 않, 하고 자연광을 좋아하는 나는 생각한다. 벽 쪽에 놓인 낮은 육각 테이블은 요즘 화이트 컨셉 카페에서 많이 보이는 백회색 대리석 무늬이다. 카운터 뒤로는 찬장에 놓인 티 케이스들이 보인다. 티도 맛있을 것 같다, 다음에 먹어봐야지.



공간을 공간으로 대우할 수 있기를. 사진도 적당히 찍고, 작업도 조금만 하고, 책도 그만 읽고, 그저 이 공간에 나 자신을 녹여버릴 수 있기를. 그러기 위해 내 마음가짐도 조금씩 고치고, 내 안에 흠뻑 머금을 수 있는 좋은 공간도 더 많이 찾아다녀야겠다고 카페홀릭다운 다짐을 해본다.



wash your worries away _ Laundry 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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