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 소설
다음날인 일요일은 시작부터 우울했다.
양의 몸은 지금까지 흘린 중 최고로 많은 땀을 하룻밤 사이에 뿜어냈다. 밤새 5벌의 환자복을 갈아입고도 모자라 양은 위아래에 면으로 된 티와 바지를 입고 그 위에 축축한 환자복을 걸쳐야 했다.
금희가 집에 가져가 세탁하려고 일회용 비닐에 넣어 둔 땀에 젖은 속옷과 수건을 본 양은 울컥했다.
아침부터 걸려온 전화도 한몫했다.
“종로 5가 꽃집인데요, 한 달이 지나도록 주문하신 화분을 안 찾아가셔서요. 이미 비용은 내셨는데 어떻게 처리할까요?”
“아… 제가 지금 찾으러 갈 수가 없어요. 그냥 쓰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전화는 그대로 끊겼다.
화분도 찾으러 못 가는 신세.
한 치 앞을 모르고 화분을 주문한 어리석은 인간.
어쩌다, 내가 지금,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양은 자기 연민의 늪에 빠져들었다.
창가 자리는 이른 오전에 갑작스레 비워졌다.
옆자리의 노인이 침대째 실려 나갈 때 양은 눈을 감았다. 잠시 뒤, 비닐봉지를 든 아들이 찾아와 꾸벅 인사했다. 그의 손에 들린 투명한 봉지에는 며칠 새 눈에 익은 전기 포트가 덩그마니 담겨 있었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폐가 많았습니다. 저희 때문에 불편하셨을 텐데 이해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나이 든 아들이 깊숙이 허리를 숙여 사과했다. 금희와 양도 얼른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받았다.
어제를 넘기기 어렵다던 옆자리의 노인은 어쩐 일인지 밤을 넘겼다.
“어머님께선 다시 중환자실로 가시는 거세요?”
“아닙니다. 저희는 이제 집으로 갑니다. 어머니께선 늘 집에서 돌아가시고 싶다 하셨거든요. 병원에 와선 아팠던 기억 밖에 없다며 절대로 여기서 죽게 하지 말라고… 의식을 잃기 전까지 몇 번이나 부탁하셨지요. 의사들도 더 이상 해 줄 치료가 없다고 하고, 보셨다시피 저희가 식구들이 많아서 옆자리의 아가씨나 어머니께 이 이상 피해를 주면 안 되겠다 싶어, 그래서 모시고 갑니다. 그동안 정말로 죄송하고, 감사했습니다.”
아들은 다시금 허리를 숙였다. 금희와 양도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조심히 가세요. 어머님께서 가시는 길… 편안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아들은 엷은 미소를 띠며 조용히 걸어 나갔다.
자박자박. 발걸음이 멀어져 가는 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밀려든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공기는, 멀리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에 깨졌다.
드르륵, 병실의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 웅성거리는 소리,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누군가의 말이 끝나면 다시금 반복되는 소리는 병동 입구 쪽에서부터 성큼성큼 다가오며 점차 또렷해졌다.
“우리 젊은 의사 선생님이 없으면 아쉬워서 어쩌누.”
“아이고. 선생님이 잘 돌봐 주셨는디 이제 가면 나는 어쩐다요?”
“선생님, 안 가시면 안 되나요? 보고 싶을 거예요!”
병실 복도를 타고 울리는 떠들썩한 소리는 빠르게 다가왔다.
“그동안 아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새로운 선생님이 오셔서 저보다 잘 도와 드릴 겁니다.”
“제가 없어도 약을 꼬박꼬박 챙겨 드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날이 그날이었다. 원석이 떠나는 날.
그동안 다른 병실의 환자들과 원석의 관계가 어떤지 몰랐던 양은 오늘에야 환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원석이 특별한 의사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 아쉬우면서도 뿌듯했다.
원석이 다음 방으로 옮겨가면 그 이전 방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기에 병동 전체가 사원석이라는 의사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그의 마지막 말에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후련함이 섞인 원석의 목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양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뭐라고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생각해야 했다.
이윽고 발소리가 양의 병실 앞에서 멈추었다.
드르륵. 문을 열며 원석이 들어섰다.
양은 코에 씌워진 호흡기를 뺐다. 원석은 잠시 양을, 양의 손에 들린 호흡기를 바라보다 말했다.
“드디어 오늘이 마지막이군요. 이런 날이 오네요.”
밝은 목소리였다. 양도 웃으며 준비해 둔 말을 건넸다.
“선생님이 제 첫 주치의라서 다행이에요.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양이 꾸벅 인사하고 고개를 들자 원석의 표정이 어딘지 바뀌어 있었다. 목소리도.
“…하양 씨.”
“네.”
“반드시! 생존해 계십시오.”
“네? 당연히! 생존해 있을 건데요? 하하.”
“…5년 뒤에 제가 찾아볼 겁니다.”
“5년 뒤면, 그때는 제가… 저를, 선생님이 기억이나 할까요?”
“안 잊어요. 꼭 찾을 겁니다. 그러니… 반드시 살아 계세요.”
“…네. 애써 볼게요.”
양은 천천히 호흡기를 다시 썼다. 원석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뒤돌아 나갔다. 원석은 마지막까지 노력하는 의사였다.
잘 가요.
양은 원석의 뒷모습에 대고 말없이 인사했다.
원석이 떠나고 양은 남은 이날, 혈색소 수치는 8.7. 어제의 8.4보다 높았다.
혈색소가 수혈을 안 받고 자기 힘으로 오른 건 처음이었다.
백혈구는 2,520. 과립구는 1,509. 혈소판이 1만 1천으로 여전히 2만보다 낮아 노란 피를 맞아야 했지만, 숨쉬기도 한결 나아져 호흡기를 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