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옳았다 13화

실화 소설

by 홍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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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은 양을 단숨에 환자로 만들었다. 젊은 의사는 차트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양을 휠체어에 태우더니 간호사에게 수혈을 지시했다. 혼자 충분히 걸을 수 있다며 양이 일어서려 하자, 의사는 피곤에 절은 혀를 내두르며 야단을 쳤다.


“괜찮다니!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예요? 환자 분은 혼자 걸어 다닐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에요! 이 몸으로 돌아다니면 큰일이 난다고요! 여자의 혈색소 정상 수치는 12에서 16 사이예요. 보통 8 밑으로 내려가면 빈혈이 심각하다고 보고 수혈을 하죠. 근데 환자 분의 경우는 5.4예요! 무슨 말이냐면, 피에 헤모글로빈 그러니까, 산소가 거의 없어서 벌써 쓰러지고도 남았을 상태라는 뜻이라고요!”


“네? 저, 어제까지도 정상적으로 출근했어요. 출근길에 두 번, 퇴근길에 한 번… 숨이 차서 중간에 서서 쉬긴 했지만요.”


“아이고. 아주 서서히 빈혈이 진행되다 보면 몸이 그 상태에 적응하는 경우가 어쩌다 있어요. 그래도 환자 분은 언제 뒤로 넘어가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어요. 지금부터는 휠체어에서 절대로 내려오지 마시고, 환자가 화장실을 갈 때도 보호자가 항상 따라 들어가도록 하세요. 아시겠어요?”

양은 피를 맞고 또 맞았다. 빨간 피 1봉이 몸으로 다 들어가려면 1시간 반이 넘게 걸렸고, 다음 피가 준비되는 틈틈이 소변 검사와 혈액 검사에 CT 촬영도 해야 해서 양의 손목으로 마지막 핏방울이 들어갔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한 저녁이었다. 그사이에 회사를 다녀온 대양이 수상과 금희를 데리고 늦은 저녁밥을 먹으러 나갔다. 세 사람은 양을 혼자 두지 않으려 번갈아 다녀오겠다고 했지만, 양이 억지로 등을 떠밀어 모두 보냈다. 어제까지 모든 일을 스스로 하던 젊은 딸이 휠체어에 앉힌 채로, 85도 각도로 고정된 불편한 응급실 의자에 앉아 자신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늙은 부모의 촉촉한 눈길을 마주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잠시 혼자가 된 양은 그제야 스르르 무너졌다. 한참동안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떨구던 양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번에도, 또 어긋났어.”


추석이 지나면 보자고 허세하와 약속한 지 일주일도 안 됐다. 거의 1년 만의 약속이었다.


“이건 해도 해도 정말 너무하잖아? 백혈병이라니! 안 만나, 다신 안 만나!”


양은 하늘에 대고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일 년 만에 얼굴 한번 보겠다는데, 백혈병이라니… 이건 너무 심하잖아!


양과 세하는 지독하게 엇갈리는 인연이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믿는 양의 관점에서 보자면, 두 사람은 절대로 사랑할 수 없었다. 만나려고만 하면, 빠지기 힘든 회식이 양에게 갑자기 잡힌다던지, 양을 만나려면 타야 하는 기차를 세하가 눈앞에서 놓친다거나, 예보도 없이 100년 만의 폭우가 쏟아져 지하철이 멈추고 비행기가 못 떠서 함께하려던 일정까지 취소됐다. 양이 이전에 일했던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세하와 3달 동안 매일 봤던 시간이 안 믿길 정도로, 세하가 휴학을 끝내고 대학에 돌아간 뒤로 두 사람이 만나려면, 50년 만의 폭한 정도는 그러려니 해야 할 정도였다. 하늘이 말리는 건가. 그런 느낌에 양은 용기를 내 진심을 표현하려던 마음을 접었다.


그래, 일 년에 한 번도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 양은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휴대폰을 꺼내 세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 주에 보기로 한 약속, 못 지킬 거 같아. 나 오늘 병원에 왔는데, 입원 치료가 필요하대. 미안.”


백혈병이란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아직 스스로도 믿기 어려울 만큼 얼떨떨한 데다 이 모두가 도무지 현실감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하는 바로 답을 보냈다.


“밥이야 다음에 먹으면 되지 뭐. 어디가 많이 안 좋은 건 아니지? 입원하면 알려 줘. 면회 갈게.”


과연 우리에게 다음이 있을까…? 양은 휴대폰을 손에 쥔 채로 잠시 멍하니 바닥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