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옳았다 21화

실화 소설

by 홍유진

다음날, 새벽같이 원석이 찾아왔다. 잠을 설쳤는지 푸석푸석한 얼굴이었다.


“아, 선생님! 저 오늘 퇴원하는 거 아니었나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오늘 퇴원시킬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퇴근하고 집에 갔는데 연락이 왔어요. 골수 검사의 결과가 추가로 나왔더군요. 22퍼센트였습니다. 처음에 말했죠? 암세포의 비율이 20퍼센트를 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22퍼센트라고요? 제가요?”


“네. 하양 씨는 만성골수백혈병의 블라스트 크라이시스(blast crisis)입니다. 이걸 한국어로 뭐라고 하는지 갑자기 생각이 안 나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거기까지 말한 원석은 잠시 골똘히 표현을 골랐다.


“골수가 미쳐서 제멋대로 날뛰는 겁니다! 보통은 만성골수백혈병으로 의심되면 골수 검사만 하고 환자를 집에 보냈다가 2주 뒤쯤 외래 진료에서 결과를 보는데, 안심해 교수님께서 워낙에 촉이 좋으셔서, 하양 씨가 만성의 가장 위험한 상태라는 걸 알아보신 겁니다! 이 경우는 집에 갈 수가 없어요. 당장 항암 치료를 시작해야 합니다.”


“항암…이요?”


“네. 안 그래도 제가 밤새 하양 씨의 항암 치료 계획을 짜고 있었어요. 곧 알려드리겠습니다.”


양은 원석이 감탄해 마지아니하는 심해의 날카로운 직감을 고마워해야 할지 탓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양이 일단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원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갔다. 아침밥을 거의 그대로 물리고 나서 양과 금희는 각자 생각에 잠겨 심해를 기다렸다. 아직은, 확인이 필요했다.


심해는 지금까지와 다르게 이날 회진의 마지막 순서로 양에게 들렀다.


“하, 양 씨? 오늘은 좀 어떤가요?”


“잘… 모르겠어요.”


“흠. 아무래도 골수 이식을 준비하는 게 좋겠습니다.”


“골수 이식이요? 꼭… 해야 하나요?”


“그게 좋습니다. 가족 중에서 기증해 주실 분이 있는지 찾아봅시다. 부모님보다는 형제나 자매 사이에 유전자가 일치할 확률이 더 높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유전자를 반씩 받기 때문에 부모와 일치하는 유전자의 비율은 보통 50퍼센트 정도입니다. 100퍼센트가 일치할 확률은 부모의 경우가 2퍼센트, 형제의 경우가 25퍼센트, 타인의 경우는 2만분의 1퍼센트입니다. 그러니 지난번에 진료실에서 본 친오빠부터 검사해 보지요.”


양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심해는 격려하는 의미로 양의 어깨를 살짝 짚더니 돌아서 나가며 금희를 불렀다.


“보호자 분, 잠깐 밖에서 보실까요?”


심해의 말에 핏기가 사라진 금희가 비틀거리며 따라 나갔다. 양이 귀를 곤두세웠지만, 심해가 뭐라고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갑자기, 금희의 목소리만이 낮은 비명처럼 복도에 울려 퍼졌다.


“선생님! 우리 애 좀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양은 뜨거워지는 눈을 감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 돌아와 무슨 말이든 해 주길 기다렸지만 금희는 오래도록 자리를 비웠다. 한참만에야 돌아온 금희는 병원에 온 이래로 가장 밝은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는 이제 너랑 웃기만 할 거야. 우리,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웃자!”


“교수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응? 아… 골수 이식을 꼭 해야 한다네? 그냥 그 말만 했어.”


양은 금희의 목소리에 숨겨진 떨림과 두려움을 알아차리고, 원석을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주치의는 왜?”


“물어볼 게 있어요.”


양의 항암 계획을 짜다가 불려온 원석은 바쁜데 왜 찾느냐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양은 원석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선생님,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지 물어보라고 하셨죠? 솔직하게 대답해 주실 수 있나요?”


“정말로, 있는 그대로 듣고 싶어요?”


“네.”


“양아, 왜 그래? 선생님, 말하지 마세요!”


“엄마, 엄마가 그러면 내가 물어볼 수가 없어.”


“저, 어머님께서는 잠시만 나가 계시죠.”


주치의의 지시였기에, 금희는 안 떨어지는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차마 멀리 가지 못하고 하얀 커튼 뒤에 멈춰 섰다.


“정확히 알고 싶어서요. 제가 항암 치료를 하다가 죽을 수도 있나요?”


“항암을 시작하고 한 달 안에 환자의 10퍼센트가 죽습니다.”


“한 달 안에 10퍼센트…면, 시간이 지날수록 죽을 확률은 더 높아지겠네요?”


“아, 이런! 하양 씨,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여기 병실의 다른 사람들을 봐요. 다들 죽을 각오로 목숨을 내놓고 들어와 있는 겁니다. 살려고 말입니다!”


양은 눈물이 맺히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걸 느꼈지만 그대로 원석의 눈을 바라봤다. 가슴을 치며 내뱉는 금희의 한숨 소리가 두 사람 사이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양은 물음을 멈출 수 없었다.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알아야 했다.


“그럼 저는… 정확히 어떤 상태인가요?”


“하양 씨는 지금, 만성이지만 병이 많이 진행돼서 급성백혈병의 성격을 보이는 말기입니다. 나쁜 암세포가 폭발적으로 쏟아지기 때문에 먹는 약을 통한 표적 치료로는 도저히 다 막을 수가 없어요! 이젠 좋은 세포든 나쁜 세포든 센 항암제로 모조리 다 죽이고 골수 이식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골수 이식은… 위험하다던데, 꼭 해야만 하나요? 하면… 얼마나 살 수 있나요?”


“하양 씨, 내 말 잘 들으세요. 이식은 선택지가 아닙니다. 지금은 그것밖에는 답이 없어요! 그것도 6개월 안에 해야 삽니다! 문제는, 하양 씨의 단계에서는 항암 치료에 대한 반응도가 낮아서 만성보다 훨씬 위험한 급성백혈병에 비해서도 5분의 1 수준이라는 겁니다. 골수 이식을 꼭 해야 하느냐고 물었죠? 솔직히,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조차 의문입니다.”


양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혹시 이 병원에 저 같은 환자가, 또 있었나요?”


“안 그래도 저도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1명이 있더군요.”


“지금까지… 1명이요?”


“네.”


“그 1명은, 어떻게 되었나요?”


“2010년, 응급실에서 기록이 끊겼습니다.”


“끊겼다는 말은….”


“…네.”


겨우 태연함을 쥐어짜서, 양은 원석에게 인사를 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원석은 잠시 멈칫거렸지만, 곧 바쁜 걸음으로 떠났다. 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서둘러야 했다.


원석이 나간 자리로 들어오던 금희는 멈칫했다. 양은 눈을 뜨고 있지만, 눈동자가 텅 비어 있었다.


양은 검은 구름 바다가 이어진 밤하늘에서 홀로 끝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죽음을 마주하고서야, 지금까지 자신이 죽음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어쩌면 죽음은 언제나 양의 관심 밖에 있었다.


그야말로 오만에 대한 벌이 아닌가. 한낱 인간에 불과하면서 죽음이 닥쳐도 나만은 다르리라고 자신만만하던 자, 나만은 죽음을 피해 가리라 외면하던 자에게 인생이 내리는 벌이었다. 이제 죽음은 더 이상 머릿속 추상이 아니었다. 고통을 동반한 실재였다. 양은 온몸으로 죽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죽어 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부조리했다. 죽음에 저항하라던 카뮈의 외침이 비로소 와닿는 양이었다. 결국은, 할머니가 옳았다.


그렇게, 누구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비행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