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 소설
병원을 나온 양은 머리도 정리할 겸, 천천히 걸었다.
아무런 결론 없이 도착한 종로 5가에서 그동안 미루던 분갈이를 위해 커다란 화분 하나를 꽃집에 주문하고, 그릇 할인점에 들러 손바닥만 한 뚝배기도 샀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져서, 저녁쯤에는 의사가 헛다리를 짚은 거라며 자신하기에 이르렀다.
왼쪽 갈비뼈 아래로 딱딱하게 부풀어 오른 배는 양이 보기에도 분명히 정상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렇게 순식간에 암이 생길 리는 없어. 배가 슬슬 불편하기 시작한 지는 한 달쯤 전부터였다. 만약에 검사 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고 묵은똥이 잔뜩 뭉친 거라면 얼마나 우습겠는가. 새로 산 뚝배기에, 엄마가 싸 준 청국장을 끓여 먹으며 양은 느긋해지려 애썼다.
다음날도 어김없이 양은 집에서 혜화역으로 10분을 걸어가 삼각지역까지 15분 동안 지하철을 타고 17분 동안 걸어서 재단에 출근해 하루 종일 일을 하고, 퇴근했다.
동네 의사가 던진 한마디로 양을 둘러싼 세상이 모조리 바뀌지는 않았다. 하지만 양은 사무국장을 포함한 직원 누구에게도, 병원에서 들은 말은 우스갯소리로도 안 꺼냈다. 갓 서른이 넘은 나이에 팀장 자리까지 오른 양으로서는, 어떤 일이든 뚜렷한 결과가 나오기 전에 입을 떼는 건 쓰잘머리가 없는 짓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날 의사가 엷은 미소를 띤 얼굴로 반갑게 맞았을 때,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이 그래 왔듯이 모든 일이 결국엔 다 잘 풀릴 거라고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의사는 마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처럼 입을 열었다.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저, 괜찮나요?”
“혈액 검사에서 이상이 발견돼 분석 기관에 문의한 결과, 만성골수백혈병으로 나왔습니다.”
“뭐라고요?”
“만성골수백혈병입니다.”
“백혈병… 이요? 제가 백혈병이라고요?”
“네. 만성골수백혈병입니다.”
“만성골수, 백혈병. 확실한가요?”
“그렇습니다.”
어떻게 이런 무시무시한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 있지? 이틀 사이에 얼굴을 바꾸고 원래 그토록 무관심한 표정이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세상 앞에서, 양은 낯선 메스꺼움을 느꼈다. 하지만 양은 나이에 비해 숱한 인생의 위기를 넘어왔고,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요즘처럼 의술이 발달한 시대에 치료법이 없을 리 없다. 분명히 길이 있을 터였다. 일단 큰 병원에 가 보면… 양의 마음이 급해졌다. 아직은 절망할 때가 아니었다. 고작 동네 내과에서 이렇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어!
“선생님, 그 결과가 언제 나왔나요? 여기의 검사 결과가 틀릴 수도 있는 거죠?”
“어제 오후에 혈액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백혈구의 수가 너무 많았습니다. 정상인은 1만 이하인데, 10만이 넘었어요! 그래서 혹시 백혈구의 모양이 어떤지 봐 달라고, 원래는 거기까지는 안 보는데, 제가 특별히 분석 기관에 추가로 의뢰했더니 역시나 이상하다고 답이 왔습니다. 백혈병의 종류마다 백혈구 세포의 모양이 다른데, 하양 씨의 백혈구를 살펴보니, 만성골수백혈병과 같았어요! 유해 적혈구가 100개 중에 78개나 됐고, 블라스트가 증가한 소견도….”
의사는 뭔가 대단한 의학적 발견이라도 한 사람처럼 마구 떠벌렸다. 방금 백혈병 판정을 받은 사람에게, 빌어먹을 사실을 알려 줘서 고맙다는 인사라도 바라는 건가.
양은 훔칠 새도 없이 떨어지는 눈물을 숨기려 고개를 숙이면서, 부질없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그저 물었다. 이런 느닷없는 불행이 닥친 것에 대해 비난할 사람이, 양에게는 필요했다.
“그럼 어제 오후에 바로 제게 전화를 주셨어야죠. 하루라도 빨리 큰 병원으로 가야 하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 병의 경우는 약만 꾸준히 먹으면 괜찮습니다. 고혈압처럼 평생 먹어야 하지만요. 하루를 먼저 알고 모르고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병이에요.”
백혈병. 그 말이 담고 있는 무게에 짓눌린 양에게, 이제 막 서른을 넘어 인생의 황금기를 달리던 젊은 여자에게, 의사의 말은 그의 의도와는 달리 전혀 위로가 안 됐다. 평생, 죽을 때까지 약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치명적인 선고에 불과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1초 전의 평범한 삶에 대한 사망 선고.
이 모든 일이 당신이 말하듯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라면… 저 의사는 왜 이다지도 놀라운 흥분에 들떠 보이는 거지? 손으로 잡을 수 있는 희망의 지푸라기가, 양에게는 필요했다.
“이 내과에 온 사람 중에 저처럼 백혈병으로 의심 받은 사람이, 또 있었나요?”
“아니오! 제가 벌써 찾아봤는데, 우리 내과가 생긴 이래 처음입니다!”
백혈병,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 지금까지 이곳에 온 다른 사람은 없었다… 이 모든 말이 양의 머릿속에서 비현실적으로 뒤엉켰다. 양이 더 이상 아무 말도 잇지 못하자, 의사가 자기 딴에는 위로를 한답시고 슬며시 휴지를 건네며 말했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다른 암이 아닌 게 어딥니까? 다른 암이 이 정도였으면, 벌써 죽었습니다.”
하지만 양은 의사를 따라 웃을 수 없었다. 겨우 쥐어짜듯 한마디를 더 물었을 뿐이다.
“선생님, 제가 백혈병이 아닐 가능성은 정말로 없는 건가요?”
“네, 전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