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옳았다 5화

실화 소설

by 홍유진

이틀 뒤, 월요일의 이른 아침. 혜화동 로터리의 대학로내과 진료실에서는 감기 때문에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의사가,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 얼굴로 양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지난겨울에 감기가 심해서 자주 오셨는데, 요즘은 좀 어떠세요?”


따스한 관심이 담긴 의사의 말에, 양의 마음이 한결 놓였다.


“감기는 이제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래, 오늘은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양이 증상을 설명하자, 의사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디, 배를 한번 볼까요?”


이때까지만 해도 양은 피부과에 처음 갔을 때처럼, 의사가 자신을 꾀병쟁이로 대할까 봐 조심스러웠다. 추석 때 양의 이야기를 들은 가족들의 반응처럼. 2번이나 임산부로 오해받았다는 말에 가족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주먹으로 마사지하듯 배를 살살 두드리거나 윗몸 일으키기를 열심히 해 보라는 농담 섞인 충고도 나왔다. 단순히 변비나 운동 부족으로 생긴 똥배라면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동네 의사는 양의 배를 여기저기 눌러보더니 좀처럼 읽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복부 CT를 찍어 보는 게 좋겠습니다.”


양은 가슴 언저리로 올렸던 블라우스를 내리면서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어디가 안 좋은가요?”


“찍어 봐야,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때껏 양이 겪은 가장 큰 병은 초등학교 때 앓은 폐렴이었다. 열이 40도를 넘은 탓에 2주나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평생 CT를 찍을 만큼 아픈 적이 없었던 양은, 최근에 의사들이 돈벌이를 위해 아무런 이상도 없는 사람들에게 CT나 MRI 같은 비싼 검사를 마구 시킨다고 비판하던 TV 뉴스를 떠올렸다. 어떤 병이 의심되는지도 모르는데, 왜 아까운 돈과 시간을 들여 몸에도 해로운 CT를 찍어야 한단 말인가. 양은 입가에 살짝 웃음을 띠고 의사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선생님, 제가 너무 바빠서요. 꼭 찍어야 하나요?”


“그게 좋겠습니다.”


웃음기가 사라진 의사의 눈은 이미 심각함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양은 자신이 사회의 장난을 겪을 만큼 겪은 나이라고 판단했다.


“이런 동네 내과에서 CT도 찍을 수 있어요? 그런 비싼 기계가 있나요?”


“저희와 협력하는 영상의학과가 근처에 따로 있습니다. 봅시다, 오늘은 예약이 다 찼고, 내일 오전에 가시면 됩니다.”


“CT를 찍을 정도로 큰 병에 제가 걸렸다면, 바로 종합 병원으로 가 볼게요.”


일부러 들으라는 듯 도전적인 양의 말투에도, 의사는 기분이 나쁜 얼굴빛 하나 없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일단은 찍어 봐야, 3차 병원에 낼 진료 의뢰서를 써 줄 수 있습니다.”


의사와 대화를 할수록 양의 의심은 커져만 갔다. 먼저 시간을 벌어 두고, 그사이에 다른 내과에서 다시 진료를 받아 보는 게 좋을 듯했다.


“그럼, 토요일로 예약을 잡아 주세요. 제가 정말 바빠서요.”


“토요일은 너무 늦습니다. 내일 당장 찍어야 합니다!”


생김새와 다르게 끈질긴 의사였다. 그래도 양이 시원스레 답하지 않자, 의사는 네모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되도록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이 나이에, 이런 경우는, 암밖에 없습니다.”


“암… 이요?”


“네. 정 바쁘시면 일단 혈액 검사와 소변 검사라도 하고 가세요. 하루, 이틀이면 결과가 나올 겁니다.”


아주 잠깐, 세상이 정지한 듯 멍한 순간이 지나자, 그저 어이없는 웃음이 터졌다. 그럴 리가 없어. 이 의사가 뭔가 크게 잘못 안 거야. 혼자 속으로 되뇌면서도 양은 의사의 지시에 따라 피를 뽑히고 오줌을 눴다. 자꾸만 손이 떨려서, 오줌을 담을 종이컵을 다시 받아야 했다. 다음 진료일은 이틀 뒤인 수요일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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