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18도 행성에서 발견한 '경외'

대기권의 질서와 바울의 기도 사이에서

온실효과가 없으면, 지구의 평균 온도는 영하 18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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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자라지 않는다. 물이 흐르지 않는다. 숨을 쉴 수 있는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당신이 앉아 있는 그 자리도, 창밖의 나무도, 오늘 아침 마신 커피를 키워낸 흙도 모두 없다.


나는 이 사실을 NASA 고다드 우주비행센터 과학자 이은지 박사의 책에서 다시 읽었다. 『지구 관찰자의 기후 노트』. 기후변화가 인류에 미치는 영향을 위성 데이터와 대기 모델로 알기 쉽게 설명한 책이다. 이 박사가 직접 선물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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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과학을 읽고 있는데, 자꾸 다른 곳으로 마음이 갔다.


태양에서 출발한 빛이 8분 19초를 날아와 대기권에 닿는다. 그 빛의 일부는 반사되고, 일부는 흡수되고, 일부는 지표면을 데운 뒤 적외선이 되어 다시 올라간다. 그때 대기 중의 수증기와 이산화탄소가 그 열의 일부를 붙잡는다. 놓아주지 않는다. 덕분에 지구는 영하 18도가 아니라 평균 15도를 유지한다.


영하 18도와 영상 15도 사이.


그 좁은 간격 안에, 우리가 아는 모든 생명이 있다.


버지니아의 3월은 아직 차갑다. 그날도 서재 창으로 늦은 오후의 빛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 페이지에서 한참 책을 덮고 앉아 있었다. 빛은 너무 많아도 안 되고, 열은 너무 쉽게 빠져나가도 안 된다. 들어와야 할 만큼 들어오고, 머물러야 할 만큼 머문다. 이 정밀함 앞에서 설명보다 질문이 먼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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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행성은, 생명이 견딜 수 있는 폭 안에 이토록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는가.


오랜 기간 기자로 일하면서, 나는 인간이 만들어낸 참혹함을 많이 봤다. 북한의 강제수용소, 탈북민들의 고통스러운 증언, 전쟁과 기근의 현장. 사람은 언제든 잔인해질 수 있고, 체제는 믿기 어려울 만큼 차가워질 수 있다는 걸 반복해서 보았다. 그래서 세상을 볼 때도 먼저 파괴와 결핍을 떠올릴 때가 많다.


그런데 그날, 대기권의 구조를 설명하는 숫자들 앞에서 나는 전혀 다른 감정을 느꼈다.


파괴가 아니라 보호. 잔인함이 아니라 배려.


'경외'라는 말 외에는 달리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적도의 뜨거운 공기가 올라가면, 극지의 차가운 공기가 내려온다. 이 차이가 바람을 만든다. 바람은 구름을 밀고, 구름은 비가 되어 메마른 땅 위로 내린다. 바다에서도 온도와 염분의 차이가 거대한 순환을 만들고, 그 느린 흐름이 수천 킬로미터를 돌아 생명을 실어 나른다. 폭풍조차 제멋대로가 아니다. 지구 곳곳에 쌓인 열을 옮기며 전체의 체온을 조절한다.


몸속의 세포도 그렇다. 세포는 바둑판처럼 딱 맞춰 서 있지 않다. 조금씩 어긋나 있고, 그 미세한 어긋남이 움직임을 만든다. 완벽한 정렬은 오히려 정지에 가깝다. 살아 있는 건 흔들린다. 균형을 잃지 않는 선에서 계속 움직인다.


생명은 멈춰 있는 상태가 아니라, 붙들린 움직임 속에서 유지된다.


바람의 길, 해류의 곡선, 세포 하나의 떨림까지. 이 행성에는 생명이 머물 수 있도록 정교하게 조율된 질서가 곳곳에 놓여 있다.


에베소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특별한 기도를 드린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3:18–19)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을 설명하려다가 공간 전체를 불러온다. 위와 아래, 앞과 뒤, 좌와 우. 한 방향으로는 모자랐다. 그 사랑을 말하려면 차원 자체를 끌어와야 했다.


나는 이은지 박사의 책을 덮으며 바울의 이 기도가 떠올랐다. 대기권의 두께 안에서, 영하 18도와 영상 15도 사이의 간격 안에서, 마른 땅에 비가 내리는 순서 안에서. 내가 읽은 건 분명 데이터였지만, 느낀 건 다른 차원이었다.


그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좀 더 조용히 시선을 돌려보면, 그 사랑의 흔적은 이 행성의 곳곳에 새겨져 있다.


문제는 다시 인간이다.


산업혁명 이후 이산화탄소는 빠르게 늘었고, 지난 한 세기 동안 그 속도는 더 가팔라졌다. 대기 안에 열이 과도하게 갇히기 시작했다. 생명을 지키던 보호막에 균열이 간다. 기후가 변하고, 재해가 커지고, 농업과 생태계가 흔들린다.


그리고 그 피해는 언제나 약자에게 먼저 간다.


부유한 나라는 방파제를 세울 수 있다. 관개 시설을 만들 수 있다. 에어컨도 켤 수 있다. 하지만 방글라데시의 농부는 해수면이 올라오면 논을 잃는다. 사하라 이남의 어머니는 가뭄이 길어지면 아이에게 먹일 물부터 걱정한다. 태평양 섬나라의 아이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터전이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지켜본다.


기후의 문제는 결국 정의의 문제가 된다.


인간은 늘 기술과 정책으로 밖의 구조를 고치려 하면서, 정작 내면의 욕망은 방치한다. 성경이 더 깊은 자리로 시선을 돌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문제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의 마음이 있다.


물리학은 모든 체계가 시간이 지나면 무질서 쪽으로 움직인다고 말한다. 에너지가 흩어지고, 구조가 무너지고, 질서가 닳아 없어지는 방향. 엔트로피(entropy)다.


인간의 욕망도 그쪽으로 흐른다. 관계는 끊어지고, 자원이 착취되고, 균형은 깨진다.


그런데 생명은 그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외부의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무너진 것을 회복하고, 다시 살아갈 구조를 만든다. 물리학의 일반적인 흐름을 거슬러 올라간다.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신트로피(syntropy)라 부른다. 무질서 안에서 질서를 세우는 힘. 생명은 무너짐에 순순히 자신을 내맡기지 않는다.


나는 그 움직임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방향일지도 모른다.


무너지는 쪽이 아닌 회복으로. 흩어지는 쪽이 아닌 연합으로. 사망이 아닌 생명으로.


이 방향은 십자가의 방향과 겹친다. 인간은 예수를 통해 승리와 해방을 원했다. 그러나 예수는 십자가로 향했다. 인간은 그 길을 패배로 보았다. 그러나 그 길은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부활의 길이었다.


부활은 그 어둠을 뚫고 나온 빛이다. 죽음의 방향을 뒤집은, 가장 근본적인 회복이었다.


이제 바울의 그 기도가 마음에 와 닿는다.


히브리적 사유에서 '안다'는 것은 머리에 저장하는 게 아니다. 온 몸으로 경험하고, 그 경험이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까지 포함한다. 바울이 기도한 '앎'은 그런 종류의 앎이었을 것이다.


그 사랑을 알게 되면, 가만히 앉아 있기가 어려워진다. 무너지는 생태계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대신, 질서를 지키는 쪽으로 손을 보태게 된다. 먼 나라 재난의 뉴스를 끄는 대신, 그 고통 곁으로 한 걸음 다가가게 된다.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마음의 방향이 달라진다.


이은지 박사는 과학자의 눈으로 지구의 변화를 세심하게 관찰했다. 나는 같은 데이터 앞에서 다른 것을 보았다. 과학이 틀린 게 아니다. 과학이 보여주는 것 너머에, 과학이 설명을 멈추는 '왜'가 있다.


왜 이 행성은 이토록 정밀하게 생명을 품도록 되어 있는가.


바울의 표현을 빌리지 않고는 이 질문을 다 담아내기 어렵다.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대기권의 두께 안에서도, 바다의 흐름 안에서도, 세포 하나의 미세한 떨림 안에서도 생명은 여전히 붙들려 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하루도, 그 붙들림 안에 있다.


블레즈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다.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침묵 안에서 오히려 창조주의 숨결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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