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책들은 국경을 넘는다

시진핑이 금지한 책들이 워싱턴에 모인 이유

어떤 나라에선 책 한 권이 전기보다 먼저 끊긴다.

불이 꺼지고 수도도 멈추고 그래도 사람들은 남는다.

오늘은 그런 이야기가 살아 있는 서점 하나를 소개하려 한다.


워싱턴 DC, 듀퐁서클의 계풍서원.

계풍서원-중국책들.jpg 계풍서원의 책들 Photo by AL


워싱턴 DC에 오래 살면서도 이 서점을 잘 몰랐다. Dupont Circle. 지식인과 보헤미안의 거리이자 대사관이 즐비한 워싱턴 외교가의 관문. 주말이면 사람들이 브런치를 먹고 봄이면 벚꽃 아래를 걷는 동네. 그 한복판, 거의 반세기 동안 워싱턴의 명소로 사랑받아 온 독립 서점 Kramers 바로 옆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문 하나가 있다.


JF Books. 季風書園. 계풍서원(중국어 발음: 지펑슈위안).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런데 그 문 안에는 다른 서점에선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공기가 흐른다.


문을 열자마자 낯익은 향이 먼저 다가왔다. 오래된 책과 막 인쇄된 책이 뒤섞인, 시간이 겹쳐진 냄새. 요즘은 잘 맡기 힘든 종류의 공기다. 공간은 넓지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 답답하지 않다. 벽을 따라 빼곡히 꽂힌 책들 사이로 손글씨 메모들이 붙어 있다. 상하이 본점 폐업 당시 이 서점을 스쳐간 사람들이 남긴 마음의 흔적들. 그 옆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는 당시 사진들이 나란히 걸려 있다.

계풍서원-벽에 붙은 응원.jpg "너를 위해 나는 순수한 하루를 만들리라 바람처럼 자유롭고 질서 있는 파도의 꽃처럼 되풀이되는" 미국 시인 E.E. Cummings의 시 구절. 아래는 폐업 때 시민들이 남긴 글


이 서점은 원래 상하이에 있었다. 1997년, 중국 사회과학원 연구원 옌보페이가 지하철역 옆에 열었다. 이름은 '계풍(季風)'. 계절따라 방향은 바뀌어도 멈추지 않는 바람. 단순한 서점이 아니라, 작가와 지식인이 모여들어 생각이 부딪히는 광장 같은 곳이었다. 전성기엔 상하이에만 8개 지점을 둘 만큼.


중국 공산당이 가만 놔둘리 없었다. 보조금을 끊고, 강연을 취소시키고, 건물주를 압박해 임대료를 올리게 하더니, 20주년 기념 책마저 '불법 출판물'로 회수시켜 버렸다. 서점 하나를 못 견디는 체제. 급성장하는 중국이라는 화려한 간판 뒤에 가려진 시진핑 시대의 민낯이었다.


마지막 날에는 전기와 수도마저 끊겼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휴대폰 불빛으로 책을 비추며 책을 고르고 누군가는 기타를 꺼냈다.

그리고 노래가 시작됐다.


Blowin’ in the Wind.

Do You Hear the People Sing.

상하이의 계풍서원은 떠나지만, 계절풍은 계속 불 것이다" — 마지막 밤 고별 연설 (2018년 1월 31일) Photo by AL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 , 레미제라블의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 이어졌다.

그날, 서점은 끝내 닫혔지만 질문은 닫히지 않았다.


2012년 서점을 인수했던 위미아오(于淼)는 2018년 강제 폐업 뒤 가족과 함께 바다를 건넜다. 플로리다를 거쳐 워싱턴으로 왔고, 2024년 9월 다시 문을 열었다. JF Books. 이름은 바뀌었지만 바람은 그대로였다.


오픈 소식을 위챗에 올렸더니, 중국 당국이 바로삭제했다. 태평양 건너편 작은 서점 하나가 아직도 그렇게 불편한 모양이다.


매대 위에는 중국 본토에서라면 서가에 올릴 수도, 검색할 수도,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책들이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다. 티베트 이야기. 위구르 소수민족 이야기. 홍콩과 대만에서 나온 책들. 아무 설명 없이, 아무 경고 없이, 그냥 꽂혀 있다. 이곳 사람들은 투사가 아니다. 구호를 외치거나 깃발을 흔들지 않는다. 그저 읽을 자유, 볼 자유, 생각을 나눌 자유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그것이 가장 오래 가는 저항인지도 모른다.

계풍서원-반체제 인사 책.jpg 죄인 루옌스(陆犯焉识). 마오쩌둥 시대 노동교화소에서 20년을 버틴 지식인의 이야기. 중국 공산당 치하에서 지식인이 겪는 탄압이라는 주제가 서점의 역사와 겹쳐진다. Photo AL

인상적인 건 이 작은 공간에서 정기적으로 작가 초청 행사가 열린다는 것이다. 중국 이슈가 다수이지만, CSIS의 한반도 전문가 빅터 차가 이곳에서 독자를 만났고, 최근엔 스탠포드 대학의 신기욱 교수가 새 책을 들고 이곳을 찾았다. 워싱턴에 거대한 싱크탱크와 호텔형 국제회의장이 넘쳐나지만, 담론이 꼭 그런 곳에서만 만들어지는 건 아니란 걸 이 서점이 조용히 보여주고 있다.


그 매대 앞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만약 이곳에서 탈북민 작가가 미국인 독자 앞에 앉을 수 있다면? 탈북 역사 30여 년, 그들의 삶을 다룬 책은 해마다 늘고 있지만 미국 독자 손에 닿을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중국에서 금지된 책 옆에, 북한에서 존재할 수 없는 이야기가 나란히 꽂히는 것이다. 벽에는 탈북민 화가의 그림이 걸려 있고, 작가의 목소리가 격해질 때쯤 옆에서 평양음대 출신 피아니스트가 조용히 쇼팽의 녹턴을 연주하기 시작하는, 그런 저녁을 상상해 본다.

강춘혁 그림.jpg 탈북 청년 래퍼 강춘혁 씨가 워싱턴 행사 중 즉석에서 그린 그림 2024년 7월 23일. Photo by AL


서울에도, 워싱턴에도 이런 서점이 하나쯤 더 생기면 어떨까. 북한에는 김정은 가족만 사는 게 아니다. 2,600만 명이 살고 있다. 그런데 세상은 핵과 미사일, 기괴한 왕조의 스타일만 이야기한다. 주민들의 얼굴은 늘 뉴스 뒤편에 가려져 있다. 마치 평양의 화려한 포템킨 빌리지(외부에 보여주기 위해 치장한 가짜 마을) 뒤에 깊고 검게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작은 서점 하나가 그 그림자 속 얼굴을 세상에 꺼내 보여주는 심장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자유란, 어쩌면 서로 다른 진실이 아무 말 없이 함께 놓여 있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계풍서원에선 아직 바람이 불고 있다.


한반도의 계절풍도, 이제 바뀔 때가 되지 않았을까.


JF Books (季風書園) 1509 Connecticut Ave NW, Washington, DC 20036 Dupont Circle역 (Red Line) 북쪽 출구 도보 2분. Kramers 바로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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