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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의 의미

무언가 달라지기를 원하는 마음

by rechoice

여러분은 '방황'이라는 단어의 뜻을 눈으로 읽어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그걸 보고서야 제가 방황 중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적 있습니다.


방황이란 헤맬 방 彷, 헤맬 황 徨 자를 써서 '이리저리 헤매어 돌아다님', '분명한 방향이나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헤매고, 또 헤매는 상태를 의미하는 거죠. 최근 몸도 마음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저를 정확히 설명하는 말 같았습니다.



'방황'하는 제 상태를 어렴풋이 인지하게 된 건, 지인분께 일일 서핑 강습을 받으면서였는데요. 지난 1년간 쌓아 온 서핑 실력을 점검하기 위해서 "애정을 담은 스파르타 훈련한다고 생각하시고 세게 말씀하셔도 괜찮아요"라고 요청드렸었습니다. 그랬더니 "정신 안 차려? 지금 그게 파도하고 보드하고 수직 방향이 맞아? 머리는 뒀다 뭐 해? 생각이라는 걸 하면서 타라고!" 라며 따끔하게 혼내시더라고요.


조류가 심한 날 보드 방향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건 저의 고질적인 문제긴 했는데, 순간 가슴에 확 와 닿은 것은 그런 지적보다 "머리는 뒀다 뭐 해? 생각이라는 걸 해라"는 말이었습니다. 확실히 저는 요즘 생각이라는 걸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았거든요.


어떤 결정이 괜찮은지 아닌지, 무엇을 원하는지가 예전처럼 명확하게 보이질 않았습니다. '넌 이게 좋아, 싫어? 어떻게 하고 싶은거야?'라고 스스로 물어봐도 '모르겠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습니다. 날카로운 말들도 쉽게 받아쳤던 원래 모습과 달리, 누군가 빨리 대답을 하라고 다그치면 입을 꾹 닫고 눈물만 뚝뚝 흘리게 됐었어요. 이런 마음에도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을텐데, 조용히 흔들리고만 있는 제가 답답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종범 만화가의 에세이「그래, 잠시만 도망가자」에서 이런 문장을 읽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슬럼프는 그저 지친 상태가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이유를 잃어버린 것'이라고요. 어떠한 일을 하는 '이유'가 그 일의 유통기한을 정해주기 때문이라나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만화를 그리는 이유가 '재미있어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마감이라는 재미없는 현실을 마주하면 그만두고 싶어질 수 있는데, 만화를 그리는 것 = 재미있다 라는 마음 속 공식이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이종범 만화가는 오히려 '돈 때문에 만화를 그린다'던 친구가 더 오래 만화를 그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재미가 있든 없든, 하고 싶든 하고싶지 않든 일단 만화를 그리면 원고료가 입금되기 때문이죠. 그러나 원고료가 만족스럽지 못하거나 더 이상 돈에 크게 가치를 두지 않게 되는 경우, 이러한 이유도 곧 유통기한을 맞게 됩니다.


이종범 만화가는 어떤 일을 하는 이유가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도, 그 이유들의 유통기한이 만료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살다 보면 좋아서 시작했지만 싫어지는 일도 있고, 장기적으로는 계속하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하기 싫어지는 일도 있는 것이 당연하죠. 이종범 만화가는 슬럼프에서 진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건 일 자체가 아니라, '일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를 잃어버려서 갈팡질팡하는 내 마음'이라고 하더군요.


그의 조언에 따르면, 슬럼프가 왔다는 건 처음 그 일을 시작할 때 의미 있었던 이유의 유통기한이 다 된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다고 합니다. 잠시 멈춰서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의미와 이유를 지우고, '지금 이 순간 이 일을 계속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할 타이밍이라는 거죠.


언젠가, 사람이 방황을 하게 되는 이유는 '당신이 무언가 지금과는 달라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 이종범 만화가와 비슷한 메시지를 전하려던 게 아닐까요?



여기까지 쓰다 보니, 방황하는 마음이 든다는 건 스스로가 과거의 나와는 조금 다른 모습, 다른 이유를 향해 나아가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양한 질문에 선뜻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던 것도, 어쩌면 제가 스스로 '넌 예전과는 달라졌어, 그 일을 계속해야 하는 새로운 이유가 있는지 찾아봐'라고 경고하려던 것 아니었을까요?


그토록 좋아하던 서핑을 하면서도 공허함이 느껴졌던 순간들, 재미있다고 생각했지만 계속 하고 싶지는 않았던 일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과연 나는 무엇 때문에 이런 것들을 계속하고 싶은가? 혹시, 계속 하고 싶지 않아진 건 아닐까? 질문을 조금씩 던져 봅니다. 그 질문들에 답해나가다 보면 이 방황도 끝이 나리라는 생각입니다.




황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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