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행복해질 거라는 신화

#067 토론토에서 101명 만나기

by reconceptor


벨우드 공원에서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노인을 만났다.


그는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반대편 손을
무릎에 얹은 채 꼿꼿한 자세로 앉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는 스트라이프 줄무늬가 있는 회색 양복에

유행이 지난 중절모 밑으로

은빛 머리카락이 언뜻언뜻 보였다.


중절모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가

세월의 흔적을 다 가리지는 못했다.

쭈글쭈글해진 구릿빛 피부 아래
앙상하게 드러난 광대뼈가
꺼져가는 생명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두컴컴한 수렁을 앞에 두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사람처럼
그는 말을 건네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늙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는 푸념하듯 자조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의 눈동자는 뿌옇게 바래버린
반투명한 회색이었다.

그의 동공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그의 몸 전체가 떨리고 있었다.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줘 보지만

떨림을 멈추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그에게 더 말을 붙이고 싶었지만
그는 쓸쓸히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 봐.
나는 도움이 안돼."


그는 조심스럽게 벤치에서 일어나
멀어져 가는 나를 바라보았다.


@RECONCEPTOR





그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그에게 앞으로 남은 삶의 희망은 무엇일까...


눈가에 서서히 주름이 잡히고

나잇살이라는 문제에 직면하면서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인생에 대해서...
인생의 행복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되었다.


'나 지금까지 잘 살아온 것 맞아?'

'앞으로 어떻게 살지?'



지금 인생을 다시 한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을 다음 생에
그대로 리바이벌해야 한다면?


대학입시를 목표로 초중고등학교를
4당5락의 자세로 모두 올인하고

대학에서는 취업을 준비하며
스펙 쌓기에 몰두하고

첫사랑의 설렘은 잠시,
지옥 같은 이별을 경험하고

직장에서는 눈치 보며 야근하고
온갖 송사에 시달리고...


상상만 해도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진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살아간다.

아무런 의심 없이.


언젠가는 행복해질 거라고 믿으면서.


지금은 힘들어도 참고 견디다 보면

나중에 언젠가는 행복이 찾아올 거라는
믿음이 일종의 신화처럼 세상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언제가 될지 모를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기꺼이

현재를 저당 잡히며 살아간다.


하지만 언제 올지 모를 행복을 위해
지금 이 순간을 그렇게 보내는 것은
행복이라는 목적을 위해

오늘을 수단으로 소모해버리는 것과 같지 않은가.



시간이 있을 때 장미 봉우리를 거두라.
현재를 즐겨라. 인생을 독특하게 살아라. Carpe Diem.

<죽은 시인의 사회>



처음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봤을 때
무척 감동적이고 가슴 뭉클했지만,
진지하게 내 삶에 투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Carpe Diem'

'Seize the day'


"그래.

현재를 즐겨...

지금 너에게 행복한 순간을 선택해...

닐과 토드, 녹스 너희 말이야...
조금만 더 용기를 내.
어른들 말에 휘둘리지 말고
너의 삶을 살아."


나의 감상은 주인공들의 삶 언저리를
맴돌다 사라져 버렸던 것 같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나의 현실로 돌아왔고

'죽은 시인의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해.

하지만 시와 미, 낭만과 사랑은

삶의 목적인 거야."


의학, 법률, 경제, 기술이
삶의 목적이 된 사회.

시와 미, 낭만과 사랑은
삶의 목적이 될 수 없는 사회.


그것이 바로 '죽은 시인의 사회'이다.


키팅 선생님의 말을 가만히 읊조려 보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어느새 '죽은 시인'이 되어 있는

나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는

좋은 대학 가는 것이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이

많이 버는 것이

조건 좋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남 보란 듯이 성공하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다.


그것이 이 사회가 요청하는
행복한 삶이며 미덕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맞바꾼
오늘의 노력과 열정의

수혜자가 누구인지 생각해보라.


작게는 부모와 가족의 기대일 수 있고

학교와 직장의 목표일 수 있고

크게는 국가와 민족의 요구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꿈과 미래를

그들이 말하는 행복에 쉽게 저당 잡히고
자신의 행복과 동일시한다.


이렇게 다시 묻고 싶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행복이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난 지금까지 내 삶의 거의 대부분을
놓치며 살아왔어.
내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컴퓨터로 보고 있잖아.
난 내 가족을 그리워나 하고 싶지 않아.
단 한순간도 놓치기 싫어.
축구도 가르쳐 주고 발레 발표하는 것도 보러 가고 싶어.
난 세상을 바꾸는데 관심 없어.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 11



나는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해냈을 때
진정한 행복이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다른 것들은 대의를 위해서 얼마든지 희생하고 감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성공과 출세 가도를 달리다가
가족의 사랑과 친구와의 우정을 발견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영화나 소설 속의
주인공들을 보면 잘 공감이 가질 않았다.


나는 행복이 가까이에 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인생의 굴곡진 터널을 지나고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어느 순간,
나의 마음 한켠에도 시가 깃들기 시작했다.



강아지 털을 얼굴에 부비부비 하고,
함께 신나게 공원을 산책하기.

맛있는 음식을 즐겁게 요리해서
친구들과 함께 수다 떨며 먹기.

친구와 장난치며 카톡 하기.

친구와 좋은 곳에 찾아가서
지금까지 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하기.

영감을 주는 책 읽기.

어깨가 들썩여질 만큼
신나는 음악 듣기.

가족과 유쾌하게 통화하며
농담 주고받기.

새벽하늘을 바라보며
북극성과 오리온자리 찾기.

하늘의 바람에 따라
변화하는 구름 구경하기.

활짝 핀 꽃밭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 좇아가기.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여행하기.

흥에 겨운 술자리에서
좋은 사람들과 마음껏 웃고 떠들기.

사랑하는 사람과 설레는 마음으로
손잡고 걷기.

하고 싶다고 생각만 하고 몇 년째
계획만 세웠던 일들 완수하기.

갑자기 하고 싶은 것을
아무 걱정 없이, 계산 없이
지금 그냥 하기.


모두가 시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 모두가 시인이 되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가슴에 시가 깃들기 시작한
그날부터 나는 작은 행복에 미소 짓고

하루하루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인생의 매 순간 중요하지 않은 때는 없다.

매일의 행복이 쌓여 삶의 행복이 완성된다.


행복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있다.


그러니까 지금 행복하자.

작은 순간이라도, 하루에 한 번 행복해지자.


나는 시인들의 사회에서
행복하게 나이 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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