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 토론토에서 101명 만나기
여름 기간 동안 Sheridan College에서
계절학기 수업을 들었다.
숙소에서 가깝기도 하고,
오랜만에 그림도 그려보고 싶어서였다.
Sheridan College는
애니메이션과 일러스트레이션으로
유명한 학교이다.
특히 애니메이션 전공자 대부분이
Walt Disney나 Pixar Animation Studios,
DreamWorks Pictures 등에 취업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Oakville, Brampton, Mississauga에 캠퍼스가 있는데,
나는 Oakville의 Trafalgar 캠퍼스에서 수업을 들었다.
Drawing, Painting, Portrait 등의 수업을 신청했다.
수업이 있는 날이면,
조금 일찍 가서 도서관이나 컴퓨터실에
죽치고 앉아 책을 보거나 컴퓨터 작업을 했다.
어느 날 도서관으로 통하는 복도를 지나는데,
bulletin board에 재미있는 모집공고가 붙어있었다.
일러스트레이터 구함.
어린이 그림 동화책 원고의
일러스트를 그려줄 분을 찾습니다.
당장 페이를 줄 수는 없지만,
출판계약 시 그림에 대한
저작권과 인세를 드릴 예정입니다.
관심 있는 분은 아래 연락처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동화책 일러스트라...
대학 졸업 후 잠시 학습지 일러스트레이션을 해본 적이 있다.
짧은 마감기간 내에 많은 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어깨와 등이 굳고 허리가 휘었다.
수입은 꽤 괜찮았지만,
재미도 점차 사라지고 지리한 작업량에 지쳐갔다.
무엇보다 기획자가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졸업한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기 때문에
작업으로 현실과 타협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결국 그만두었는데,
그때 만약 학습지가 아닌 동화책의
일러스트레이션을 했다면 어땠을까...
전집류의 경우 학습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와 편집자, 디자이너와 함께 논쟁도 하고
합의도 하면서 나만의 무언가를 만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항상 남아 있었다.
나는 뭔가에 홀린 듯 핸드폰으로 공고문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 한참을 고민하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나와 J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J는 영업직에서 20년 이상 일해온
50세 초중반의 싱글여성이었다.
일을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알아보던 그녀는
어릴 적부터 소망했던 동화책의
원고를 집필했다.
그림 동화책이었기 때문에
원고를 잘 표현한 그림이 있어야
출판사 컨택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영업을 주업으로 해왔기 때문에
출판사 컨택은 문제없다고 말했다.
동화책의 내용은 이랬다.
어린 소녀가 잠자기 전 버블 목욕을 하면서
버블 속에 투영된 다양한 동물과 환상을
꿈꾸며 다시 잠자리에 든다는 것이었다.
J도 Burlington에 살았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동네 Chapters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날 또한 그런 날 중에 하나였다.
우리는 스타벅스에 앉아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
뭐 안 좋은 일 있어?"
오전에 Toronto에 다녀와서
조금 피곤하다고 둘러댔지만,
내 표정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뭐야?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괜찮으니까 얘기해봐.
뭐든 들어줄게."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프로젝트 초반이었기 때문에
J에게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려준 적은 없었다.
"어머~ 너무 멋지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다니까.
그런 멋진 프로젝트를 하다니,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
"하지만 프로젝트를 시작한 첫날,
모든 사람들에게 거절당했어.
갈수록 사람들 앞에 서는 게 힘들게 느껴져.
또 거절당할까 봐..."
J는 깊고 진지한 눈빛으로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내 영혼까지 꿰뚫어보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도 잘 알다시피,
나는 20년 이상 영업일을 했어.
나는 얼마나 많은 거절을 당했을까?
밤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거야.
나도 맨 처음 거절당했던 순간을 잊지 못해.
내가 몇 마디 떼 지도 않았는데,
매몰차게 손사래를 쳤지.
사무실에서 쫓겨난 적도 있었어.
그때는 나도 마음에 상처를 받고,
의기소침해졌지.
그런데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상처받을 일도 아니야.
처음 보는 누군가가 너에게 와서
뭔가를 부탁했을 때,
네가 그 부탁을 들어줄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마 거절할 확률이 훨씬 높을 거야.
그런데 누군가 너의 제안을
혹은 부탁을 수락하고 받아준다면,
그건 기적이 일어난 것과 같아.
처음 계약이 성사됐을 때
나는 뛸 뜻이 기쁘기도 했지만,
오늘의 이 기적을 만나기 위해
그동안 그렇게 거절당해왔던 거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더라.
그 뒤로는 거절을 당해도
아무렇지 않았지.
오늘의 수모와 모욕을 한방에 날려줄
놀라운 기적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아니까.
거절은 기적으로 가는 길일뿐이야.
실망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너만의 기적을 만들어봐."
J의 진심 어린 조언은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 다음날...
조금 더 용기를 내서 사람들에게 말을 건넸고,
거절을 당하고 무시를 당해도
괜찮았다.
누군가는 기적이 되어 나를 찾아올 테니까...
J의 조언은 현재 나의 삶에도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다.
어떤 제안을 했을 때,
혹은 지원을 했을 때,
거절을 당하거나 불합격을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좌절하고 실망하고 있기보다는
오히려 아직 찾아오지 않은 기적을 만나기 위해서
더 많이 시도하고 도전했다.
기적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노력은 거절을 만들고,
거절은 기적을 만들며,
기적은 기회를 만든다.
오늘도
나는 언젠가 만나게 될 기적을 기다리며,
거절당해도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서
다시 도전하는 용기를 실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