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진다 싶으면, 다른 한 부분이 꼭 나빠진다

#065 토론토에서 101명 만나기

by reconceptor



세계 어디를 가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자신의 인생 중 한 부분이

괜찮아진다 싶으면

다른 한 부분이 꼭 나빠진다는 거야.

- Bridget Jones's Diary -


영화 '브리짓 존스 다이어리'의 한 장면 @Craig Sunter https://flic.kr/p/iQd9FW



나는 화창한 하늘 아래

레이저 빔처럼 따가운 햇살이 쏟아져내리는

거리를 바쁘게 걷고 있었다.


강렬한 햇살에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Queen Street의 풍경은

오래된 건물들 너머로 보이는

퀴퀴한 그래피티를 배경으로

바쁜 발걸음과 여유로운 몸짓들이 뒤섞여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거리 구석구석을 스캔하듯 바라보다

미술재료 전문상점, 즉 화방이 눈에 들어왔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침 지우개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매장에 들어서니

두 명의 여직원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한 명은 물감을 정리하며 청소를 하고,

다른 한 명은 계산대에서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다.


Val과 Martina였다.


나는 스케치북과 지우개를 살펴보다가,

두 여성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Val은

부드러운 흑발 사이로 늘어진 은색 브릿지가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무척 호의적이고 친절했다.


Martina는

코와 입술, 그리고 귀에 한 피어싱이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조금은 단호하고 시니컬하지만

호기심도 많은 여성이었다.


나는 딱딱한 지우개 하나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여기 계산 좀..."

"1달러 57센트예요."


Martina가 지우개를 계산해주었다.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려던 순간,

'저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잠시 멈칫하다 다시 뒤를 돌아

Val과 Martina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Val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15분만 시간 좀 내주실 수 있나요?"

"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Val은 awesome을 연발했다.


"너무 멋져. 너무 재미있겠다."


Val은 Martina에게 달려가

내 이야기를 하며 프로젝트에

참여해보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건 어려워.

우리 지금 일하는 중이잖아."


Martina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실망한 표정이 역력한 Val을 바라보며,

일하는 동안 짬짬이 그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겠다고 말했다.


"초상화를 보고 마음에 들면,

제 초상화도 그려주세요~"


Val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Martina의 눈치를 살폈다.

Martina는 시큰둥하게

네가 해봤자 얼마나 하겠어라는 표정으로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Val이 화방 구석 한켠에 자리를 잡고 섰다.

손님이 없는 틈을 타 그려야 했기 때문에

정말 빠르게 스케치를 해 나갔다.


그림을 받아 든 Val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Martina~ 이 그림 좀 봐~

얘 예술가 맞는 것 같아!"


그림을 본 Martina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짓더니,

자기도 한번 그려보라고 주문했다.


Martina는 계산대에 그대로 서 있었고,

나는 중간중간 계산하는 손님들을 피해

그려야 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나에겐 조금 속상한 그림이었지만,

Martina는 자신의 초상화에 만족스러워했다.


Val @RECONCEPTOR



Martina @RECONCEPTOR


"아..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어.

그래서 나도 네 초상화를 그려주고 싶은데..."


Val이 연필을 쥐고

나의 초상화를 그리려 하자,

Martina가 눈치를 주었다.


"업무시간에 초상화를 그리다니...

그런 안될 말이야."


Val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 이렇게 잘 그려줬는데...

나도 보답하고 싶어."


그래서 내가 퇴근 후에 만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내가 퇴근 후에 다른 파트타임이 있어서...

차라리 내가 쉬는 시간에 하면 좋을 것 같아.

내일 오전 10시까지 여기 다시 와줄 수 있어?"


다음날 Val을 만나기 위해 다시 화방을 찾았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제는 보지 못했던 다른 직원만 있을 뿐이었다.


"저기... Val은 어디 있나요?

오늘 10시에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요."

"잘 모르겠는데요."


10분이 흐르고...

20분이 흘렀다.

하지만 그녀는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아... 어제 연락처를 받아둘걸 그랬다.'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며,

내 연락처가 담긴 쪽지를 남기고 왔지만,

끝내 연락은 오지 않았다.






세계 어디를 가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자신의 인생 중 한 부분이

괜찮아진다 싶으면

다른 한 부분이 꼭 나빠진다는 거야.



우연히 만난 사람의 초상화를
그린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나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것.


어찌 보면 별거 아닌 일 같지만,

그 과정과 결과에도

인생의 굴곡이 담겨있는 것 같다.


오늘 좋은 사람을 만나면,

내일 나쁜 사람을 만나고,

오늘 일이 좀 잘 풀린다 싶으면,

내일은 엉망진창이 된다.


인생은 마치 시소게임처럼

'나'라는 시소 위에서

행운과 불운이 오락가락 접전을 벌인다.


하지만 평생 행복할 수도...

평생 불행할 수도 없다.


그것은 언제나 시소 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시소의 기울기는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람처럼 불어와

어느 순간 조용히 한쪽으로 기운다.


하지만 시소의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나'이다.


결국 행복이란 늘 행운이 따르는 즐거운 삶이 아닌,

행운과 불운 사이에서 균형감을 잃지 않고

평행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가 싶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불행의 그늘이 있어야

행운이 따르는 삶에 감사할 수 있을 테니까...

절망의 순간에도 행복의 순간을 떠올리며

노력할 수 있을 테니까...


자신의 인생 중 한 부분이 괜찮아진다 싶으면

다른 한 부분이 나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그건 나쁜 일이 아니다.


인생의 또 다른 한 부분이

괜찮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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