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4 토론토에서 101명 만나기
대학시절,
친구와 한창 영어 원서를
함께 읽으며 영어 스터디를 했었다.
그때 읽었던 책 중에 하나가
<Bridget Jones's Diary>였다.
전공서만 읽기 지겨워서
서점에 갔다가 골랐는데,
첫 페이지를 장식한 것은
술과 담배, 처음 접하는 각종 음식의
칼로리와 몸무게...
lb... lb... lb...
그리고 자조 섞인 울분과 자기 한탄...
조금 보다가 덮어버렸다.
몇 페이지만 더 넘기면
흥미진진한 로맨스를
간접 경험할 수 있었겠지만,
한번 덮은 책은 그대로
책장에 봉인되고 말았다.
아...
이 순간...
나의 다아시 또한 그대로
책장에 파묻히고 만다.
책은 읽지 못했지만,
영화 '브리짓 존스 다이어리'에 홀릭하여
영화 CD를 매일 리플레이하며 대사를 외웠고...
<브리짓 존스 다이어리>의 전신인
<오만과 편견>의 영드도 접하게 되었다.
Jane Austen의 <오만과 편견>은
중학교 때 읽었다.
중학교 때 친구가 나중에 커서
다아시와 같은 남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다아시 앓이는
콜린 퍼스 앓이로 전환되어
한때 그가 출연한 영화를
저격하듯 찾아봤다.
영드판 '오만과 편견'의 인기에 힘입어
그는 헐리우드 영화의 다아시 역에
낙점될 수 있었다.
<브리짓 존스 다이어리>의 저자인
Helen Fielding 또한
그가 아닌 다아시는 상상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오만과 편견>을 읽으며 상상했던
다아시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지만
콜린 퍼스가 분한 다아시 또한
다아시이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Waterloo의
St.Jacob Farmers' Market에서
빛바랜 기억과 마주하게 된다.
Ontario주의 Waterloo는
토론토에서 차로 1시간 30분
정도 거리에 있다.
워털루 북쪽에 St.Jacob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철저한 청교도 정신으로 살아가는
Mennonite 교인들이
모여 사는 것으로 유명하다.
Mennonite는 네덜란드 종교개혁자
Menno Simons가
세운 재세례파 운동의 교파로,
미국에서는 '아미쉬'라고 불린다.
1663년 종교탄압을 피해
미국과 캐나다에 정착한
이들은 문명을 거부하고
집단생활을 하며
아직도 마차를 타고
재래방식으로 농작물을 재배한다.
M. Night Shyamalan 감독의
영화 <Village>에 등장하는 마을의
실사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재배한 농산물을 판매하는 곳이
St.Jacob Farmers' Market이다.
300여 년 전 유럽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물물교환을 하며
북미 최초의 시장이 만들어졌다.
이곳은 현재 캐나다에서 가장 크게 열리는
농작물 시장으로 발전했고,
시골 5일장처럼 매주 두 번 장이 선다.
피망과 토마토, 멜론, 포도, 사과, 아스파라거스,
수제 베이글과 베이컨, 햄과 치즈 그리고
메이플 시럽과 꿀과 각종 잼과 스프레드,
다양한 기념품과 유니크한 핸드메이드 제품,
그리고 앤티크 한 소품들과
햄버거, 핫도그, 샌드위치 등....
싸고 믿을 수 있는 신선한 각종 과일과 채소,
직접 만든 가공식품과 맛있는 길거리 음식들...
조금만 거닐다 보면 지갑이 쉽게 열린다.
이곳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사과 튀김이었다.
사과 깎는 기계에
새빨갛게 잘 익은 사과를 끼워 넣고,
드르륵 돌리면 껍질이 순식간에 벗겨지며
하얀 사과 속살이 드러난다.
씨앗이 든 부분을 도려내어 자른
사과에 튀김옷을 입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기름에
바로바로 튀겨낸다.
링도넛 모양의 사과 튀김에
메이플 시럽을 뿌리면 완성.
캐나다에서는 사과가 흔해서
튀겨먹고 볶아먹고 구워 먹는다는데...
한 번쯤 먹어볼 만한 별미이긴 하지만
사실 맛은 없었다.
그리고 lb의 추억은 육류 가공품을
파는 매장에서 일어났다.
아래는 그때 에피소드를 당시 느낌을 살려서 극화한 것이다.










파머스 마켓을 다녀오고
며칠 뒤...
<브리짓 존스 다이어리>가
불현듯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lb... lb... lb...

맞아... lb... pound...
왜 이제야 생각난 거야.

lb는 무게를 나타내는 단위이다.
lb라 쓰고 pound라 읽는다.
햄을 반 근 넘게 샀으니
양이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햄은 냉장고에 고이 모셔두었다가
샌드위치를 만들었는데...
너무 짜서 아무도 먹지 않았다.
그리고 곰팡이가 피었다는 슬픈 이야기...
http://www.stjacobs.com/Farmers-Market-General-Information.htm
2013년 9월
안타깝게도 이곳에 불이 나서
모두 전소되고 말았다.
2015년 다시 가본 파머스 마켓은
이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새로 지은 신축 건물이 깨끗하고 편리했지만,
예전 건물의 농익은 느낌과 정겨운 풍경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이 또한 어떠한가.
세인트 제이콥 파머스 마켓은
또 다른 역사를 써 나갈 것이다.
전통과 역사는 시간이 만들어가는 것이니까.
* cover image : @Eric Parker https://flic.kr/p/8nxY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