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준비된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 예행연습 없이 인생의 카메라 앞에 섰다. 컷, 하고 인생의 카메라가 돌기 시작하면 바로 그 앞에서 똥꼬쇼를 하든 춤을 추든 해야 했다. 그렇게 퍼포먼스를 어찌어찌 내고 살아왔다. 그래서 내 직업 커리어는 그럴듯하지 못했고 누군가가 일을 주면 닥치는 대로 했다. 몸을 파는 일이나 법에 저촉되는 일 같은 것이 아닌 이상, 나는 무엇이든지 성실하게 일을 했다. 이 일도 그 닥치고 했던 일 중 하나의 이야기다. 그 당시 나는 한 토론대회의 행사를 보조하는 실무 측이었다. 실무라고 해서 대단한 건 아니고, 엑셀을 만들고 파워포인트를 만들고 줌을 만들고 행사 뒤에서 마이크를 가져다주는 일 등등을 말한다.
토론 대회는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실무진 쪽에서 이슈를 던져주면 학생들이 4명 정도 팀을 꾸려서 찬/반을 뽑은 다음 서로의 입장에서 상대방을 반박하는 행사였다. 상금이 걸려있어 대학생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일단 1차 8강에서는 줌으로 토론을 진행하고 4강은 실제로 만나서 1등을 가리는 그런 형식이었다.
8강은 공정성을 위해서 철저히 팀원들의 배경은 비밀에 부쳐졌다. 학벌이 무엇인지, 무슨 전공인지, 어디서 왔는지는 하나도 알 수 없게 진행되었다. 그중 A와 B팀은 그중 동시에 최고 점수를 받았다. (이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다). 최고 점수를 받은 두 팀은 함께 다른 두 팀은 4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B팀은 만나서야 서로 알게 된 것이다. A팀은 강남/서울 SKY 출신, B팀은 지거국 출신이라는 것이. 잘 차려입은 A팀의 양복 앞에서 B팀은 금세 흐물흐물해졌다. B팀의 대화 중 그런 대화를 들었다. 우리가 SKY를 이길 리가 없잖아.
결국 B팀은 4강 중 최약체 팀이 되었다. A팀은 우승을 했다. 뒤풀이 자리에서 나는 그런 말을 했다. 실무진으로서 하면 안 되는 말이었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B팀을 데리고 삼겹살을 구우면서 너희가 8강에서 A팀과 동급의 성적으로 최고 성적이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니까 그 아이들이 "지금 그 말하려고 저희를 부르셨어요?"라고 말했다. 그렇지. 별로 중요한 게 아닐 수 없는 말인지도 모른다. 어른으로서 실격인 말인지도 모른다. 나는 엄격히 말해서 직업윤리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선택을 한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너무 분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A팀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나는 그저 한 인간이, 충분히 내면에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학벌이나 재산이나 이런 것들에 위축되어 나쁜 퍼포먼스를 낸다는 사실에 견딜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가는 버스를 타면서,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면서 얼굴이 벌게져 나 혼자 욕지기를 좀 나왔다. 그때 인생에서 기세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B팀은 분명 그 기세를 잃지 않았으면 우승을 하거나 적어도 준우승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토론과 전혀 상관없는 것에 매달려 자신의 퍼포먼스를 내지 못했다. 그 점이 분했다.
나는 그때 생각했다. 내가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지만, 세상에 잘난 사람 많지만, 적어도 내가 본 실력이라도 증명해 내기 위해서라도 비굴해지거나 겁먹지 말자. 나는 자기 자신을 믿자. 자기 자신을 믿자, 집으로 들어가면서 계속 되뇌었던 기억이 난다. 나를 믿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 줄 세우는 시대에서 우리는 너무 빨리 포기와 체념과 등급을 학습하는 게 아닐까. 힘을 내자. 당신과 나는 어떤 곳에서의 퍼포먼스가 가장 좋았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상대방에게 기죽지 말고 기세를 잃지 말자.
당신은 지금 그 자체로도 충분하다.
갑자기 글이 쓰고 싶어져서 생각한 글감 중 아무거나 가져왔습니다. 정말 기세라는 게 무섭다는 걸 저는 이 에피소드로 느꼈었는데요, 삶에서 중요한 게 어떤 게 또 있을까요? 구독과 좋아요 댓글 모두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