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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희 Feb 20. 2024

오늘은 너무 사는 게 무서워요

오늘을 포기하면 결국 남은 인생의 전부를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

어떤 날이 있다. 오늘 하루가 저무는 데 눈을 붙이지 못하겠는 날, 도저히 내일이 안 왔으면 하는 날. 


오늘이 그렇다. 10시에 일정을 마치고 나서 친구와 전화를 했다. 나와 같은 조울증을 앓고 있는 친구였다. 친구가 말했다. 나는 의사에게 가서 말한다고. 사는 것도 즐겁고 더 이상 불안하지 않은데, 죽고 싶다고 말한다고. 그래서 약이 부쩍부쩍 늘고 있다고.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의사에게는 70%만 말하고 30%는 정신력으로 버텨야 하는 거야. 나는 분명 그때 웃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집에 와서 세법을 정리하고 자기 직전 노트북을 켰는데,


아 올 것이 왔다.


나는 이 정체 모를 감각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이 짐승의 눈을 바라보면 절대로 안 되는 감정. 불안함? 고독함? 마음에 사무치는 감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이 감정에는 내가 아는 한 언어로 라벨이 붙어있지 않다. 정신병증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내가 이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건, 이 감정과는 독대하면 안 된다는 것. 어떤 천재지변처럼 쏟아지는 것이라 나는 최대한 납작 엎드리거나 환기를 해야 한다는 것만 경험 삼아 안다. 내가 쌓아 올린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지며 정신과 인지 도식이 뒤죽박죽이 되어 고정된 값이 없는 감정이 스파크처럼 터져나가는 것.


오래전에는 이 감정을 피하려고 소주를 먹었다. 그때처럼 오늘은 정말로 소주가 고프다. 오늘을 놔 버리고 싶다. 친구를 불러 저 앞의 함바집에 가서 눈 딱 감고 한 병 마시고 뻗을까.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내 건강은 둘째치고 다음 날을 날려버리게 된다. 도미노처럼 밀려있는 하루하루를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정신을 놓지 않아도 휩쓸리는 현실에서 정신마저 놔 버린다면 나는 내일 하루를,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있는 미래를 지탱해 낼 수가 없다.


이럴 땐 전효진 변호사의 합격 수기를 듣는다. 시험 후기를 넘어선 경이로움이 그녀의 수기에 있다. 나는 몇 번이고 그 수기에 구원받아왔다. 나는 얇은 방 안에서 이어폰을 꽂고 그녀의 100번도 넘은 목소리를 되감는다. 내일내일이, 하루하루가 무서웠어요. 옆 방 낙방한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짐승 같은 울음이었어요. 같은 말을. 그 마음은 뼈저리게 내가 느끼는 것들이다. 뼈를 깎았던 어느 날 옆 방에 있을 여자의 동물 같은 울음을 떠올린다. 내일은 또 어떻게 공부를 하지. 내일은 또 어떻게 일을 하지. 또 내일은... 이전 글에는 하루하루를 가다 보면 나아지는 것들이라고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데 오늘 같은 날은 나침반을 잃어버린다. 고개를 들면, 끝이 보이지 않는 눈발이 머리 위에서 회오리를 틀고 있다.


나는 정답을 알고 있다. 약을 먹었으니, 잠이 들 때까지 기계적인 공부를 하면 된다는 것. 새벽이 넘어서도 잠이 안 오면, 잠이 올 때까지 공부를 하면 된다는 것. 암기 문제를 암기하고 자면 오늘은 아무것도 아닌 날이 된다. 나는 그것 역시 경험 삼아 알고 있다. 동이 트면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고 나는 또 열심히 살겠지. 그러나 어떤 밤은 정말로 무서워서, 잠이 든다는 것이 무서워서 어쩔 수 없는 시간이 있다. 나는 오늘 처절하게 외로웠고 처절하게 무서웠고 처절하게 사무쳤다. 그런 사무침을 웅크려 껴안고 눈을 날렵하게 담금질해 달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본다. 오늘은 비가 왔다. 내일도 비가 그칠 것 같지가 않다. 언젠가 맑을 날이 오겠지. 이 근원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허덕이는 일 말고.


오늘은 정말 힘든 날이다. 자기 전에 전효진 변호사의 수기를 열심히 들어야지. 내 정신병을 내가 핸들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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