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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하 Feb 16. 2023

물풀 같은 늪지대

“이젠 알려줘. 너는 이름이 뭐야?”

우리는 함께 산기슭을 걸어 내려가는 중이다. 아이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나를 보았다.


방금 전, 재가 내리는 큰 웅덩이는 산 꼭대기 였다. 산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산이라고 설명하는 게 가장 잘 표현하는 것 같다. 웅덩이 가장자리로 올라가 주변을 살폈을 때 내가 있는 곳보다 더 높은 지대라곤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물리적으로 다른 언덕이나 산 따위는 없었다. 이 산의 가장 낮은 자리는 뿌얘서 보이지 않았다. 내가 눈이 나쁜 건지 안개가 낀 건지는 구분이 되지 않았다. 신기한 것은 웅덩이 가장자리는 재가 내리지 않았다. 웅덩이에만 재가 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웅덩이를 벗어나 가장자리에 올라서서부터 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흑백 필터가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왔다. 마치 아까 보았던 점자 같아 보이던 것을 스스로 읽어낸 것 같이, 읽기만 한 게 아니라 읽고 이해한 것 같이.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코를 타고 들어오는 공기에 목구멍까지 바삭 말라 목소리는커녕 숨 쉬기도 힘들어졌다. 건조함이 폐까지 쪼그라들게 하는 느낌이었다. 숨을 마시는 것뿐 아니라 내쉬는 것도 힘들어, 헐떡이고 고통스러워 목과 가슴을 붙잡았다. 아주 작은 호흡으로만 숨을 쉬니 식은땀을 흘리며 이내 주저앉았다. 눈앞이 더 뿌예졌다. 게다가 선명하게 느껴지는 왼쪽 눈썹 위의 고통. 누군가가 바늘에 실을 꿰어 넉넉히 눈썹 위를 꿰매어놓았다가 갑자기 실을 팽팽하게 조여 묶어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다, 비늘같이 돋아난 그것을 뜯어내는 느낌인가?

“괜찮아 조금만 더 걸어 내려가자. 여기서 벗어나야 숨을 쉴 수 있어.”

아이에게 겨우 기대어 웅덩이 주변을 벗어나 산을 내려가기 시작하자, 조금은 더 촉촉해진 공기가 코를 타고 들어와 숨 쉬는 게 한결 편해졌다. 왼쪽 눈썹 위의 고통도 조금씩 덜어졌다. 이내 기대지 않고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조금만 더 가면 늪이야.”

내 물음에 답하지 않고 길잡이를 하는 아이. 이름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친구라고 부르지 뭐.’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경계심 하나 없을 수 있을까?’ 

하는 진지하지 않은 의문을 품은 채 아이와 나란히 걸었다.


촉촉함은 축축함으로, 허공에 손을 저으면 물기가 느껴질 만큼 눅눅해졌다.

‘늪지대에 가까워서일까? 잠깐, 쟤는 어떻게 늪지대가 있는 걸 알았을까? 초행길이 아닌가?’

여전히 늘어가는 의문을 갖고 친구와 걷는데 이제는 발걸음도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습기 때문에 몸이 무거워진 느낌보다 바닥이 젖어 있어서 무거운 느낌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발바닥에 묻은 게 물기가 아니라 끈적한 물풀 같다. 그리고 문득, 이제야 내가 신발을 벗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어떻게 걸어왔더라?’

하는 질문이 떠오름과 동시에 내 몸은 바닥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으아 으아! 나 좀! 나 좀 잡아줘!”

허우적거리며 어떻게든 늪에서 빠져나오려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이미 정수리만 보일 정도로 빠져버린 친구를 보고 더 놀랐다. 친구를 구해야겠다는 생각 따위보다 어떻게 하면 숨을 쉴 수 있을까 더 빨려 들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하며 얼굴만큼은 어떻게든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목을 빼어 코를 한껏 위로 치켜들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내 발목을 잡고 당기는 느낌이 들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그리고 옆을 보니 친구가 아예 보이지 않는다. 이미 빠져서 더는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이내 나도 코와 이마까지 잠겨버렸다.


‘그런데 내가 왜 여기까지 와야 했더라?’

“잡아달라며. 일어나.”

발목을 붙들고 있던 악력이 나를 놓아주었다. 실눈을 뜨고 슬쩍 보니, 나는 메마른 땅 위에 반쯤 기댄 채 앉아있었다.

“어….? 꿈.. 인가?”

“아니야. 꿈. 문을 지났을 뿐이야.”

“문? 늪..이었잖아.”

“그게 문이었어.”

“하.. 다 알고 있었어? 알고 있는데 왜 미리 말해주지 않은 거야?”

바닥에서 일어나며 옷에 묻은 하얀 실 같은 것들을 떼어내며 짜증 난 목소리로 친구에게 따졌다. 친구는 그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볼 뿐 내 물음에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이고 무심해 보여 더 화가 난다.

“내 말 듣고 있어? 늪 아니 문 아니 그러니까 늪! 얼마나 무서웠는 줄 알아? 그리고! 대체 여기서 어떻게 나갈 수 있어? 아까 거기로! 아니 거기도 대체 뭔지 모르겠어. 그 홀은 뭐야?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말 좀 해봐!”

마치 친구가 날 여기로 데려온 것 같아서 괜히 원망스러웠다.

“잘 들어, 날 부른 건 너야. 날 여기로 데려온 게 너라고. 그리고 난 문을 빨리 통과하도록 도와준 거야.

네가 잡아달라며. 손이 아니어서 화를 내는 거야? 발목을 잡으면 안 돼? 나한테 화내 봤자 소용없어.

여기서 나가는 건 내가 아니라 너만이 할 수 있는 거니까. 너도 알고 있잖아?”

처음 듣는 날카롭고 단호한 목소리. 뚫어질 듯 쳐다보는 눈길. 하지만 나를 미워하는 것 같지는 않은..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를 동정하는 것 같은 느낌. 분명한 것은 이 순간 느껴지는 저 친구의 나를 향한 감정과 태도 보다 여기에서 나가는 건 나만이 할 수 있다는 말에 집중하게 되었다.

“조용히 하고 빨리 어디 숨을 곳을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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