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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하 Feb 16. 2023

인디언처럼

채근하는 저 아이를 따라 방을 나오자 사방이 문으로 되어있는 하얀 정방형의 공간에 들어섰다. 나와 아이는 왼쪽, 정면, 오른쪽 그리고 방금 내가 나온 문까지 4개의 문에 둘러싸였다.

왼쪽 문은 손잡이가 없이 불투명한 창으로 되어있다. 불투명한 유리가 불규칙한 빛을 만들어 정방형의 공간에 특이한 점자를 만들어냈다. 빛과 어둠이 이 공간을 여러 점자로 빼곡히 글을 써 내린 것 같이 보이게 했다. 정면은 문이 없는 문이다. 내 허리 정도의 높이와 내 어깨정도 되는 폭으로, 건너편은 이 공간에서 나가는 빛 이외에 어둠뿐이다. 아래로 내려가는 건지 위로 올라가는 건지 이어진 바닥이 있는지도 가늠되지 않는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니, 아이가 문 앞에 서서 미소 지으며 나를 이끌려고 손을 뻗었다. 나는 그 손길을 피하지 않고 익숙하게 손을 잡았다. 

‘뭐지.. 이 익숙함은.’

오른쪽 문은 정방형의 공간처럼 하얘서 하나로 연결된 것만 같다. 문이란 걸 알아챌 수 있는 것은 손잡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손잡이가 없는 왼쪽 문의 불투명한 유리를 통과한 빛이 정방형의 공간의 바닥과 오른쪽 문 위에도 점자를 새기고 있고 손잡이 부분만 점자가 흐릿하다. 마치 누군가 올록볼록한 점자를 일부러 짓눌러 흐릿하게 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왜 이 걸 글자라고, 점자라고 느끼지?’ 하며 아이가 이끄는 대로 오른쪽 문을 지났다.

‘잠깐, 이 아이가 문을 어떻게 열었더라?’ 이 생각이 답을 찾기 전에 나는 크기를 알 수 없는 반구의 공간에 들어섰다. 누군가 날 부르는 듯한 공기의 흐름이 내는 작은 소음에 홀리듯 반구에 조심스럽게 몇 발자국 걸어가 우뚝 섰다.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 지는 듯한 느낌에 속이 울렁거린다. 아이의 손을 잡은 채로, 아이를 축으로 천천히 한 바퀴를 돌며 내부를 살폈다.

먹이 종이에 스며든 색이다. 먹에 젖었다 마른 게 반복되어 얼룩진 듯한 질감이 느껴지는 벽과 천장은 경계선 없이 둥글게 쌓아 올려 있다. 바닥은 벽과 동일한 색과 질감으로 구 형태를 반으로 뚝 잘라놓았다. 이 경계는 나와 아이가 들어온 문으로 들어온 점자 같은 빛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점자 같은 빛은 반구의 홀에 들어서자 하얀 조개 가루가 툭툭 떨어진 것 같이 흩어졌다. 그리고 반구의 홀 천장에는 아주 진하고 뻑뻑하게 먹을 갈아 다급하게 쓴 것 같은 글이 쓰여있다. 이 글은 내부에서 쓴 게 아니라 밖에서 반구보다 큰 존재가 쓴 것 같이 느껴졌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한다. 말을 쉬게 하려는 것도, 자신이 쉬려는 것도 아니었다. 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 봐 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려주는 배려였다. 그리고 영혼이 곁에 왔다 싶으면 그제야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마냥 어둡다고 하긴 애매하지만 축축하게 어두운 이 반구의 공간에 조금씩 익숙해질 때 즈음 아이의 손을 여전히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른 손을 놓았다. 긴장한 걸까? 나인지 저 아이인지 누구의 것인지 모를 땀으로 내 손은 엉망이 되었다. 옷에 땀을 슥슥 닦아내며 아이와 마주했다.

“그런데.. 너는 누구야?”

“아.. 기억을 못 하는 거야?.. 음..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게 아닌가 봐.”

“무슨 말이야? … 나는 네가 너무 익숙해. 왜지?”

“혹시, 이번에도 색을 못 봐?”

“이번에도? 색?.. 무슨 소리…”

순간 알아차렸다. 여러 번 덧댄듯한 먹칠은 색이 있는 것임을. 그러나 나는 거울 앞에 섰을 때부터 이 아이를 마주하고 이 반구의 홀에 들어서서 지금까지 색을 본 적이 없다. 빛과 명도만 인지하고 있다.

“잠깐.. 그럼 지금 나만 흑백으로 보고 있는 거야?”

“아마도..? 그럼 지금 네가 어디에 서 있는지 모르는 거지?”

“여기.. 여기야 뭐.. 내가 어디에 서..”

두리번거리며 다시 벽과 천장을 급하게 지나던 눈이 바닥에 딱 붙잡혔다. 내 시선을 고정시킨 알 수 없는 기시감. 바닥도 벽이나 천장과 다름없는 얼룩진 먹색이라 생각했는데, 응시할수록 깊이가 점점 느껴지기 시작했다.

“평면.. 이.. 아니야?”

점점 물에 잠기는 듯한 느낌이 들어 몸이 휘청였다. 눈을 질끈 감으며 바닥에 주저앉으려 하는데 바닥은 더욱 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고 내가 예상한 범위보다 더 바닥은 밑으로 꺼졌다. 겨우 바닥에 무릎과 손을 짚고 눈을 뜨자 반구의 홀은 어디로 가고 물이 없는 큰 웅덩이에 무릎과 손을 대고 있다. 눈을 들어 주변을 다시 살피니 잿더미가 나풀거리며 조각난 면사처럼, 내리는 눈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놀란 눈으로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방금까지 같이 있던 이름 모를 아이를 다급하게 찾았다. 겨드랑이 사이로 뒤에서 불쑥 나온 손이 나를 일으켰다. 나를 들어 올리는 손은 꽤나 단단한 느낌이 들었다. 아까 손을 잡았을 때랑은 다른 느낌. 내가 의심 없이 의지해서 그런가?

“이번에는 조금 빨랐어.”

“빠르다고?”

“응. 아예 여기에 들어오지 못한 적도 많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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