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기록 (초겨울의 기록)

by 강흐름


12.1

한해의 마지막 달.

올해는 전체적으로 요동치듯 빠르게 흘렀다.


무사히 흘러줘서,

덤덤하게 매 순간을 맞이해 줘서,

흘러가는 대로 살아보는 것에 내면이 흔쾌히 동의해 줘서

혼란스러웠던 만큼 여러모로 고마운 게 많았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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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마음에 드는 일기장을 사기 위해 꼬박 하루를 썼다.

매년 하는 혼자만의 의식 행위.

고심하여 고른 만큼 새롭게 맞이할 내년 또한 행복하게 채워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12.3

‘금식’이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긴장과 불안.

끼니보다 더 중요한 것들, 더 필요한 것들에 집중해 본다.



12.4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5분.

대한민국 비상계엄 선포.


2024년 12월 4일 새벽 1시.

비상계엄령 무효 선언.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서늘해지는 등골.



12.5

주변의 말에 흔들리지 않기로 수없이 다짐하지만,

귓구멍으로 타고 들어오는 모든 것들에 태연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런 자극이 고마운 건,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그동안 쌓아뒀던 것들을 갑작스럽게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는 것.


회복탄력성이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



12.6

아무래도 세상은,

책상 앞에서 책만 탐닉하거나 취향에 맞는 정보만 담아가며 살아가기엔

너무나 다채롭고,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달라진다.

그럴수록 인연과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그저 해 나가며,

스스로를 잊지 않고 잘 챙기는 것과 내면에 귀 기울이는 것을 항상 기억하는 수밖에.


덮어 버리지 말고 당장 따지러 가자는 사람과,

굳이 나와 맞지 않는 곳에 다시 갈 필요 없다는 사람 사이에 앉아 논쟁을 바라본다.

세상일이 매사 옳다 그르다로 정의 내릴 수 없다는 것을,

입장에 따라 서로가 모르는 사연과 사정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배우며.

결국 가장 속 편한 건, 잊어버리고 가던 길을 마저 가는 것이라는 것도.



12.8

겨울의 추위는 대체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 걸까.

껴입어야 하는 옷들이 무겁기 그지없어 겨울이 올 때마다 옷들의 무게만큼 기분이 가라앉는다.


어쩌겠는가.

겨울이 있기에 만물이 쉬어 가고 성장하며,

다시 새로운 싹을 준비할 자연의 타이밍을 기다려야 하기에

그저 추위를 온몸으로 맞이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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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에도 개의치 않고 피어나는 해바라기 한 묶음을 보며,

나의 무거움은 어느덧 무색한 것이 되어버렸다.



12.9


괜찮다고 믿는 것들에 잠식되지 않고 힘차게 걸어 나갈 수 있기를.


지향하거나 마음에 품고 있는 것들이 이상주의에서 그치지 않기를.


여태껏 써온 글과 마음들에 부디 최대한의 진정성이 담기기를.


조급함과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다듬어갈 수 있기를.


매 순간 스스로를 알아차리는 게 당연하지 않기에,

그만큼 나의 의지가 함께 하지 않으면 잘도 멀어진다.



12.10

아무것도 찾지 않고 내적으로 완전히 침묵할 때,
거기엔 중심이 없다.
그러면 거기엔 사랑이 있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크리슈나 무르티


무언가를 알게 될수록 무력감 혹은 의지 약화로 이어지는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내적인 침묵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중심이 없어지고,

오히려 그곳에 진정한 자유와 사랑이 있는 거라면.

나는 지금의 상태를 조금 더 믿고 나아가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는 걸까.



12.12

서른이 넘어도 치과만 가면 여전히 덜덜 떠는 사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정말로.


스케일링을 하러 갔다가 사랑니를 뽑게 되어 서럽게 눈물을 삼켰던 날.

버틸까 했으나 쓰이지 않는 것들은 결국 썩게 되거나 주변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과감히 뽑아버렸다. 맞는 말이니까.

다섯 살 때나 지금이나 무언가 괜히 서러운 기분.


그러나 이제는 쓰이지 않는 것들을 정리할 줄도 알아야 하기에.



12.13

‘그녀’는 아주 여리지만, 아주 독하게 삶을 살아왔다 한다.

‘그’는 공부도 잘하고, 돈도 많이 벌었으며, 손주까지 있다 한다.


열심히 산 건 모두가 똑같지만, 각자 다른 모양새의 삶인 건 분명하다.

인연에 지친 ‘그녀’와, 인연을 가장 중요시하는 ‘그’의 대화는 연신 부딪힌다.

어쩌다 그 사이에 끼여 앉게 된 나는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들으며

흘려보낼 것과 흡수할 것을 속으로 나열해 본다.



12.14

올해의 마지막 단어이자, 12월의 단어.

‘분별력’.


드문드문 떠오르는 회의감과 염세주의적 생각들에 대한 작은 흔들림이 있을 때였다.

감사하게도 나는 그 흔들림에 대한 대답을 곳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세상은 이제 무언가가 더 많이 드러나거나, 더 많이 쏟아질 것이다.

정보의 무분별한 공급과 사람들의 다채로운 인식 속에서 온전히 살아남으려면,

매 순간 모든 현상을 제대로 판단하고 결정하여 행동할 수 있는 단단하고도 섬세한

‘분별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12.15

오늘은 갑작스럽게 동네 어른이 돌아가셨는데,

제 아무리 경조사를 수 십 번씩 챙겨 온 마을 사람들이어도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들에게 커다란 허무함과 약간의 두려움을 가져다준 듯했다.


문득, 나는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다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살아온 순간들이 헛된 것일까 봐,

혹은 미처 하지 못한 것들이 아직도 많을 까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나 또한 언제 생을 마감할지 모르니 마주한 인연과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최대한 들어주며 온기롭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떠나는 순간까지 마음껏 삶을 사랑하며 흘러가기를.



12.16

일을 하며 마주치는 불특정다수의 어른들이 자꾸만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인류애가 다시 살아나기라도 하는 걸까.


예전엔 그토록 불쾌하고 무례하다 싶었던 모습들이 언제부턴가 웃음을 짓게 한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사회의 먼지가 쌓이고 쌓여 왔음에도 그 틈새마다

간신히 남아있는 순수함과 단순함이 자꾸만 내 눈에 포착된다.



12.17

최근의 치과 치료로 인해 당분간 음식 섭취에 제한이 생겼다.

맵고 뜨거운 것, 딱딱하고 질긴 것, 여러 가지 재료가 섞인 것은 물론이고,

술과 커피, 카레까지 먹을 수 없다.

빨대 사용 금지에 담배도 피우면 안 된다 하니 잠시 멍 해진다.


고기를 먹지 않은 지 어느덧 4년을 넘어섰는데,

지난 며칠로 인해 더 많은 것들을 먹지 않아 보니

그 나름대로의 편안함과 편리함이 함께 다가오는 것 같다.


담백한 것, 원재료의 단순함을 살린 것, 순한 것.

음식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필요한 성질들을 가까이 두게 된다.



12.18

수련이 끝날 때마다 감은 눈과 열린 귀로 느껴지는 선생님의 음성.

오늘도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수고하셨습니다.

나에게 감사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랄게요.


나마스떼.


들려오는 것, 보이는 것, 느껴지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마주하며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주는 나 자신에게 고마움을 보내는 밤.



12.19

숫자로 된 달력이 없었다면 지금이 겨울인지, 연말인지조차 몰랐을 만큼

따뜻했던 어느 겨울날.

저 멀리 눈 덮인 한라산 꼭대기를 바라보며 계절을 눈치채기도 한다.


숫자와 시계, 뉴스에서 알려주는 날씨소식보다

자연에서 보고, 듣고, 느끼며 알아채는 계절의 순간이 더 짙어져 가는 게 반가운 날들.



12.20

올해 알아낸 나의 특징


-조용함을 지향하지만, 내적 흥이 많음.

-말하는 것보다 쓰는 것을 훨씬 좋아함.

-단 거 여전히 좋아함.

-‘한량’과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자아’가 공존함.

-여름을 많이 사랑하고, 겨울을 많이 어려워함.

-자고 일어나면 많은 걸 잊어버리거나 무덤덤해지는 마법을 부림.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여전히 많음.

-확신의 야행성. 게으름이 더해졌을지도.


여전한 것들과 새롭게 알게 된 것들, 언제 바뀔지 모를 것들을 안고서.

앞으로의 삶에 여러모로 도움이 될 나에 대한 정보 수집 완료.



12.22

등유 난로 위에 가득 올려 둔 고구마와 귤 몇 개.

일하는 동안 자기들끼리 알아서 잘 익어가는 모습이 낭만적이다.

왜 유난히 저 둘은 구울 수록 당도가 쭉쭉 잘도 올라갈까.

무겁거나 진중한 것도 필요할 때가 있긴 하지만,

이왕이면 저들처럼 달달하고 가벼운 모양새를 가진, 당도 높은 사람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명랑함과 고요함이 공존하고 있는데 이를 조화롭게 표현하는 법을 몰라

아직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많이 웃고, 뛰어다니고, 유영하고 싶어지는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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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을 좋아한다 말하기엔 여전히 쉽지 않지만,

추울수록 따뜻한 것들이 더 잘 보이고, 더 잘 느껴진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깨닫는다.

어쩌면 그래서 겨울이 가장 낭만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12.23

높은 건물 하나 없는 이 동네에선 마음만 먹으면

제대로 펼쳐지는 해돋이와 쏟아지는 구름을 덮고 누울 수 있다.

베이스캠프에 대한 생각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보기 시작한,

나에겐 엄청난 날.



12.24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그리고 원하는 만큼의 배려를 할 수 있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면서도 뜻깊은 일이다.


조절하고, 헤아릴 줄 안다는 것.

그것은 스스로와 타인에게 어떠한 애정이나 노력이 없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어느 정도의 시행착오와 시간이 꼭 필요하고,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각자의 배려는 분명 더 깊고 자연스러워진다.

그것이 ‘나’와 ‘우리’의 관계를 끊임없이 다듬어주고,

아름답게 만들어주고 있다는 것을 늘 배우는 요즘.



12.26

너무나 잘 흘러온,

여전히 착하고 따뜻한,

앞으로도 분명 잘 살아갈 것만 같은

나의 소중한 인연들을 차례로 만날 수 있었던 귀하고 소중한 올해 연말.


일렁이는 고마움과 소중함을 정말 많이 느꼈던 날들.

덕분에 에너지가 다시 채워졌다.


감사하다.



12.27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삶을 사느라 자연스럽게 거리가 멀어지는 건

대부분의 가족이 겪는 일이지만 그래서 더 소중한 시간들이 많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말과 표현이 있다면, 더 이상 미루지 않기로 했다.

사랑한다고, 감사하다고, 건강하시라고.

괜히 한마디 덧붙여 꺼내어보는 말들.



12.28

눈인지 우박인지 비인지 모를 애매한 것들이 쏟아지다 멈추기를 반복하는 날.

괜히 몸과 마음이 바쁜 느낌을 주는 ‘연말’이라는 단어와 별개로

올해는 아주 천천히 지켜볼 여유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다.


-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듭니다.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어쩌면 어제오늘의 내가 그랬던 것 같아 반성한다.

편견인 줄도 모르고 가졌던 누군가에 대한 생각이 결국 나의 오만이었음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 한마디에 마음과 눈을 이전보다 더 활짝 열어야겠다는 다짐.

활짝, 더 넓게.



12.29

어찌 됐든 웃을 일이 있다는 건 누구에게나 좋은 일이다.

길든 짧든, 크든 작든 얼굴에 웃음이 담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놓인 시공간에 영향을 끼친다.


나의 웃음이 누군가에게, 누군가의 웃음이 나에게로 전해지면서

더 많은 에너지가 만들어지고 있다.

마주하는 것들을 웃음으로 대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은근하고 편안하게,

요란하기보다 고요하게.



12.30

맞는 말이었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사연이 있는데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주어지거나, 불공평하다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

각자의 삶을 안고서 그저 나아가고 있을 뿐임을.

우리가 서로에게 말하지 못한, 티 내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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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눈물을 흘렸을 테고, 누군가는 웃었을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태연하게 지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올해의 끝자락까지 다 함께 도착했다.

이미 흘러간 것들, 이미 엎질러진 것들, 이미 옅어진 것들을 정말로 놓아줄 때가 온 것이다.

지나간 날들을 마음에 고이 넣어두거나 몇 개는 잊어버릴 셈이다.

다가올 새해엔 조금 더 나은, 조금 더 깊어진 삶을 만나기를 꿈꾸며.


마음의 무게를 누르고 또 누르며 수련을 이끌어 오신 요가 선생님의 떨리는 목소리가

내 마음까지 울컥하게 하는 저녁.


부디 우리 모두 담담하면서도 씩씩하게,

새로운 날들을 두 팔 벌려 반길 수 있기를.



12.31

마지막 날.

스스로에게 주고 싶은 것들을 미루지 않고 행했던 해였다.

어디 한번 하고 싶은 것, 끌리는 것만 마음껏 해보자 했던 것들이

이제는 삶의 지표이자 연장선이 되어 새해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 같다.

그게 너무나 감사하면서도 여전히 믿기지 않지만,

가까이 다가온 이 수많은 것들을 주저하지 않고 안아보려 한다.

그것들을 따뜻하게 품었다가 필요한 존재에게 꼭 되돌려 줄 수 있기를.


지금의 나에게 드러난 삶의 모양새는 여태껏 상상해보지 못한 온도와 분위기라

아직도 이게 진짜 내 삶이 맞나 싶다.

어쩌면 이미 그래왔던 것을 이제야 정면으로 마주하기 시작한 걸지도 모른다.



+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한 해를 만들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수많은 인연과 스치듯 교감하고,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제 안의 강하고 밝은 에너지들을 다시 끌어오려 합니다.

내년에도 잘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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