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뭐야, 여행이라면서요!
이제부터 나는 아주 오래 묵은 나의 여행 이야기들을 풀어보려고 한다. 차곡차곡 적어 모아 두었다면 조금 더 정확하고 생생한 여행기가 될 수 있었겠지만, 해외여행이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14살의 어린 내가 이후에 이 모든 것들을 글로 쓰고 싶어질 줄은, 정말 그때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오롯이 기억에만 의존한 여행기를 적게 되었다. 그때는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된 것도 아니었고, 애초에 나에게 스마트폰이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에 정말 몸만 가지고 비행기에 오른 셈이었다. 해외여행이 뭐 옆 동네 마실 나가는 것도 아니고, 정보 없지, 카메라 없지, 있는 것이라고는 중학교 1학년 수준의 (내가 중학교 1학년이었으니까) 영어 실력과 세안 도구, 갈아입을 옷 따위가 전부였다.
우리 가족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여행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차의 트렁크 부분을 개조해 엉성하지만 아늑한 캠핑카를 만들어 국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여름이면 시원한 강원도로 갔고, 겨울이면 불을 피워두고 멍을 때렸다. 저녁에는 고기를 구워 먹거나, 라면을 끓여 먹었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난 아빠가 운전하고 있을 때 깨어나, 비몽사몽 한 상태로 금방 끓인 뜨거운 수프를 마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4인 가족이 그 작은 트렁크에 어떻게 그렇게 딱 들어가 잤는지 의문이다. 지금이야 차박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그때는 차박이라는 개념도 없었을 때였는데 참 다양하게도 놀러 다녔다. 지금은 세 명이 눕기에도 비좁은 트렁크. 차를 바꿀 때가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이 차에 우리 가족의 모든 추억이 담겨 있잖아.' 하며 말씀하시는 아빠의 정적 뒤로 아쉬움이 묻어 나온다.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로는 가족여행이 뜸해졌다. 공부에 예민해지기 시작한 큰딸은 여행 얘기가 나올 때마다 짜증을 냈다. 놀러 가면 성적이 떨어질 것만 같고, 성적이 떨어지면 인생이 망하는 줄만 알았던 시기였다. 반 친구들은 자꾸 내 성적을 훔쳐봤고, 시험을 친 날에 급식을 먹고 반으로 들어오면 내 시험지는 전부 채점되어 있었다.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늘 성적을 공개당했고, '공부 잘하는 아이'로 적이 될 거면, 정말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되자고 결심했었다. 생각해보면 그런 부담들이 뭉치고 뭉치면서 나는,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꾸준히 해 왔던 것 같다. 지금 여기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나를 버려두고, 정말 내 삶을 살 수 있는 공간, 그런 곳으로 말이다.
아무튼 그런 나에게 있어 종교는 좋은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친척을 따라 한 시간이나 떨어진 교회를 다녔다. 이 교회를 다니게 된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다. 초등학교 졸업하기 직전이었나, 친척이 자신의 교회에 놀러 오라고 나를 불렀다. 셀 담당하시는 분이 매주 맛있는 간식을 가져오신다고, 그것도 비싸고 맛있는 외국 과자들만 말이다. 처음 교회에 갔을 때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도 어려운데 어떻게 주말마다 한 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다니나, 싶었는데 그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외국 과자들은 정말 큰 유혹으로 다가왔다. 그때는 세계 과자 할인점 같은 곳도 없었을 때인데 매번 다른 외국 과자들을 가지고 오시는 선생님 덕에 나와 동생, 친척까지 교회를 아주 성실하게 다녔다. 초등부를 마치고 중고등부로 올라간 후에도, 우리는 꾸준히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나에게 해외를 갈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보셨다. 광주에서는 벗어나 본 적이 없는 광주 토박이에, 인생에서 가장 멀게 간 여행이 서울에 갔던 것 딱 한 번인데, 갑자기 해외를 운운하니 그것에는 조금 겁이 나기도 했다. 가족들도 가는 거냐고 물었는데, 그것은 아니고, 나와 친척 딱 둘이 갈 거라고 했다. 가족들과 떨어지는 것에 대한 걱정이 앞섰지만, 그래도 넓게 봐서 친척도 가족이니, 친척이 간다면 어디든 괜찮을 것 같았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다. 큰 고민 없이 해외행을 덜컥 결정한 것처럼 보일 것도 같다. 꼭 그렇지만은 않았는데, 친척더러 너는 갈 거냐고 계속 되묻고, 나는 갈 거라고 했다가 못 갈 것 같다고 했다가, 고민 중이라고 했다가 갈팡질팡하는 과정을 거쳤다.
학교에 앉아 공부를 하다가, '가야겠다.'라고 다짐했다. 나에게는 숨 쉴 구멍이 필요했다. 방학 중 일주일이면 여행을 다녀와 충분히 보충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사실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었던 것 같다. 매번 같은 패턴으로 흘러가는 생활 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사건이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름을 올리고 돈을 지불하고 나서, 나는 기대감에 부풀어 눈을 감았다. 그날 우리 일행이 탄 비행기가 추락하는 꿈을 꿨다.
교회에서 일정 정도의 비용을 지원해 준다고 해도, 일주일 여행에 개인당 120만 원 꼴로 매우 적은 비용이 들었으니, 호화스러운 항공편을 끊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해외여행이라고는 이전까지 생각도 안 해본 14살짜리가 알아봐야 뭐 얼마나 알았겠느냐마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항공편을 타고 간다고 하니 겁이 났다. 같이 가는 언니 오빠들은 우리가 타고 가는 항공편을 검색해 보며 사고가 났었네, 기체가 흔들린다는 평이 있네, 이러다가 확 추락해버리는 거 아니냐 하며 무서운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비행기에 올라탈 때는 신발을 벗고 타야 된다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 정도는 깨달았지만, 불안감에 휩쓸리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날로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비행기 타고 싶지 않다고, 엄마는 내가 탄 비행기가 추락해서 딸을 다시는 못 볼 거라고는 생각 안 해 봤냐고 엉엉 울어댔다. 애당초 나는 방학 중 딱 그 일주일만 여행 갔다 오는 것인 줄 알았는데, 방학이 오기 전부터 꾸준히 예배 후에 남아 추가 연습을 해야 한다고 나를 붙잡았다. 여행이라는 달콤한 말로 포장하긴 했지만 결국 교회에서 가는 여행은, 단순한 여행이라 말할 수 없었다. 여행이 아니라 단기 선교였던 것이다.
아무리 모태신앙이라도 그렇지, 나는 그렇게까지 신앙심이 깊지 않았고, 기도할 때면 가끔 눈물이 찔끔 나오기는 했지만 그것이 온전히 은혜를 받아서라기보다는 내 신세 한탄을 하다가 억울해서 나오는 눈물이 대부분이었으며, 가까이 살았으면 별말 없이 참여했을 연습도 왕복 두 시간, 더 걸리면 세 시간까지도 걸리는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며 참여하려니 진이 다 빠졌다. 제가 좀 멀리 살아서요,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여러 차례 연습을 빠지려니 눈치도 보이는 것 같았다. 사실 눈치는 나만 봤다. 언니 오빠들은 모두 친절했는데, 친절을 친절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도 겹쳐 있었다. 중학생이니, 친구 관계 문제든, 성적 문제든, 문제들은 꾸준히 있어 왔겠지만.
아무튼 방학이 된 이후로는 별달리 댈 핑계도 없어서 열심히 연습에 참여했다. 그때쯤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데 비행기가 추락할 리가 있니! 하는 밝은 분위기가 만연했었다. 찬송을 틀어 두고 참여하는 연습에 재미가 붙기도 했었다. 일요일에는 열심히 연습해야 하니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열심히 공부하자는 다짐도 해서, 오히려 공부 효율이 더 올랐던 때다. 연습하러 가서 저녁이 되면 저녁도 사 주셨다. 막 출국하기 전 날에는 교회에서 합숙도 했다. 수련회를 온 것도 같아서 옹기종기 재미있었던 것 같다.
물론 여행이라면서 졸지에 해외 단기 선교에 파견된 사람이 된 입장은 여전히 달갑지 않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