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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기록 Apr 18. 2019

우울증 환자의 <AND-ING노트>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우울증, 공황장애, 강박장애, 범불안장애, 사회 공포증 환자의 일기

회사를 쉬게 되었다.

'병가'를 사용하게 되었다. 사유는 '중증 우울증'.


처음 나의 증상에 관해 주변 사람들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회사에 휴직계를 냈을 때

모두가 입을 모아 하나같이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일 뿐이야. 너무 걱정하지 마!"라고 응원해주었다.

그렇다.

우울증은 흔히 '마음의 감기'라고들 부르고 있다.

누구나 걸리기 쉬운 질병, 감기.

그래서 그렇게 부르는 걸까?

그런 거라면, 어쩐지 그 병에 걸린 환자로서 '마음의 감기'라는 말은 썩 와 닿지 않는다.

오히려 약을 먹어도 소용없는 질병. 나는 이쪽이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진다.


내가 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어렴풋이 자각했을 때, 사실 우울증 같은 거 단순히 멘탈의 문제니까 나 혼자서도 잘만 하면 컨트롤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아마도 2018년 6월 즈음. 초장부터 잡아야 할 것 같으니 그냥 병원에 상담이라도 받으러 갈까? 아니 그런데 기록이 남으면 내가 나중에 사회생활을 유지할 때 혹시나 마이너스 요소가 될지도 모르는데 그냥 가지 말까? 한참 이런 시답잖은 고민을 하는 동안 단 것을 사 먹거나 원하던 물건을 사면서 (그러니까 반년 동안 홀로 식욕과 물욕을 채워가며) 우울감을 잠재우기 위해 꽤나 노력해왔다. 그러는 동안 몸무게와 카드값은 늘어가고 나는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데 필사의 노력을 하며 멘탈을 유지하려는 나를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태연하게 나에게 자신들의 불만을 이야기하거나 그들 주변 사람들의 험담을 늘어놓으며 깔깔대고, 조롱하고, 그러면서 본인은 피해자인양 토로하는 사람들에게 충동적으로 화를 내거나 질려가기 시작했다. 뿐만아니라 길거리의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 불량시민들에게까지 분노가 커져가며 우울감에 분노조절장애까지 얻게 되었다. 그렇다. 반년 동안의 자가치료(?)는 딱히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더 악화됐을지도.


2019년 1월.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병원에 제 발로 찾아갔다.

우울적 기질. 이것은 타고나는 것일까? (선생님께 물어봤는데 어느 정도 타고 나는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

내가 가장 괴로웠던 것은 '진짜 내 모습'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사실이다.

32년 평생 나는 이렇게까지 분노로 가득 찼던 적이 없다.

그 분노감이 커지면서 우울감은 눈덩이처럼 더 불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러지? 지금 내 모습은 뭐지? 나 자신이 괴물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매일 마주 봐야 하는 동료들 앞에서도 제대로 웃을 수 없었고, 적막을 깨기 위해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하고, 그런 짓거리가 하기 싫어져서 결국엔 혼자만의 시작을 갖고 싶다며 자발적으로 고립하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상대인 남편에게도, 친정 부모님에게도, 친구들에게도, 회사 동료들에게도 나는 나의 우울감과 괴로움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와 동시에 '지금 이 괴물 같은 게 진짜 나'인가?라는 좌절감까지 몰려왔던 것이다.

20대 중반을 넘기고 후반을 맞이 하며 첫 번째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청춘의 나는 학교나 회사, 가족에게 소속된 나의 역할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를 찾고 싶었다. 스물일곱 살. 짧은 나의 32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경주 벚꽃
무주산골영화제

벚꽃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벚꽃 개화 시기에 맞춰 우리나라 남쪽부터 북쪽까지 벚꽃 여행을 하기도 하고,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소박한 작은 영화제의 스태프가 되어 좋아하는 영화들을 보며 영화제 일도 했다.

영화제가 폐막하자 돌연 오로라가 보고 싶어서 아이슬란드 여행을 다녀왔다.

대단한 이유는 없었다. 다녀와서 OOO을 해야지!라는 거창한 포부가 아닌, '좋아하는 것'을 따라다녔다.

그러면서 나는 진정한 나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생각보다 너무 괜찮은 사람이었다. 어딜 가나 즐거웠고, 작은 것에 만족하는 방법을 찾았고, 그로 인해 행복감을 자주 느꼈다. 모든 것이 충만했다. 나 자신이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스물일곱, 여덟. 오만이라고 해도 별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자애심이 아주아주 솟아 올라 세상에 대한 사랑과 인류애가 넘쳤다.

하지만 30을 지나 현재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인가. 내가 알고 있던 나 자신과는 아주 달랐다.

그 갭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지금의 '괴물'같은 모습의 내가 진짜 나는 아닐까, 하는 두려움과 진짜 '나'의 모습이 둘 중 어느 것인지 혼란스럽고 괴로웠다. 아마 그것이 나의 병을 더 키우는 역할을 했을지 모른다.



내 상태에 대해서 굳이 숨기고 싶은 생각이 없다.

뭐, 자랑스럽고 당당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게 내 발목을 잡으리란 생각도 안 들고(솔직히 병원 처음 가기 전엔 조금 걱정함),

진짜로 내가 타인에게 해를 입힐만한 정신질환도 아니니까 음지로 숨고 격리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일단 함께 살고 있는 남편에게 먼저 이야기를 했고, 다음으로는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고향의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는 만나서 해야겠다는 생각에 말을 아꼈다.

무작정 카톡이나 전화로 "나 우울증에 공황장애래. 그래서 일상생활이 조금 힘들어"라고 한다면,

수신자 입장에서는 얼마나 당황스럽고 놀랄 일이겠어?

그렇다. 나는 꽤나 배려있는 편이고, 환자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최근 상담에서 돈을 주고 치료받는 주제에 의사 선생님께

"여기는 긍정적인 사람들이 와서 행복한 이야기를 하는 곳이 아니잖아요.. 선생님은 매일, 온종일 저와 같은 힘에 부치고 부정적인 생각을 듣고 계시는데 괜찮으세요?"라며 정신의학과 전문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저라도 그런 이야기를 좀 덜 할까 싶어요"라는 오지랖을 보태면서.

의사 선생님은 그런 나를 보며 한숨을 푹 쉬고 "그런 걱정까지는 하실 필요가 없어요. 그런 부분이 더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 같은데 동의하세요?"라고 되물었다....


우울증. 1월 첫 방문 나의 진단은 그뿐이었지만, 차츰 병원에 가면 갈수록 공황장애가 생겼다던가 강박장애가 나타났다던가, 그러다 아주 최근에는 범불안장애와 사회 공포증이 더해졌다. 처음에는 약을 꼬박꼬박 잘 먹었는데도 자꾸만 늘어가는 증세에 반항하고 싶어 나 혼자의 판단 아래 일부러 약 먹는 걸 중단한 적이 있다. 하루에 2번 먹어야 하는데 이틀에 한 알 먹는다던가, 사흘에 취침 전 약만 먹는다던가, 그런 식으로. 결국엔 실토하고 엄청 혼났다. 뭐, 아무튼간에 늘어가는 병명만큼 먹어야 하는 약도 역시 점점 늘어났고, 생각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 나는 홀로 대환장파티를 하고 있다.

'오블리비아테' 부모님에게서 자신에 대한 기억과 흔적을 전부 지우고 있는 헤르미온느

뭐랄까. 이것은 '죽고 싶다'와 같은 감정과는 다르다.

사라지고 싶다. 연기처럼 홀연히. 혹은 수증기처럼 증발했으면 좋겠다고.

아니면 영화 <해리포터>에 나온 헤르미온느의 명장면이었던 '오블리비아테' 주문으로

나에 관한 모두의 기록과 흔적, 기억을 지우고 조작한 다음 어딘가로 꽁꽁 숨어버리고 싶다.

내가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 바로 이것이다.

의심이 많아졌고, 예민해진 감정상태에 따라 극단적인 선택지만 만들고 있다.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고 무엇이든 최악을 먼저 떠올린다.


처음 이 병의 시발점은 아마도(라고 쓰고 분명히라고 읽어주세요) 회사생활에서 어긋난 업무방식과 인간관계, 거기에서 오는 자괴감 그동안 나라고 굳게 믿었던 내 모습과는 너무 다른 괴물 같은 내 모습의 괴리감이었겠지만, 병세가 더 짙어진 것은 최근 할머니의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태어난 순간부터 20살까지 같은 방을 쓰며 한 이불 아래 함께 자고 일어났던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벌써 한 달이나 지난 일이다.

할머니는 내가 21살 때, 초기 알츠하이머와 중증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요양원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엄마와 아빠는 맞벌이 부부셨고, 오빠와 나는 대학이 멀어서 본가에 잘 들어가지 못한 데다 작업량이 많은 공대와 미대를 다니고 있었다. 할머니를 가까이에서 보살필 수 있었던 여유가 전혀 없었다.


할머니는 전형적인 옛날 사람이었다.

남자아이, 남자아이. 남자아이는 집안을 잇는 기둥. 여자아이는 집안일을 돕는 작은 아이.

그래서였을까? 나는 할머니에게 사랑받고 싶어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확실히 나는 그 누구에게 보다도 할머니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가득했다. 할머니가 요양원에 들어가고 나서야 그 사랑과 인정을 받게 되었지만, 까마득한 20년의 세월과 최근 12년의 기억으로 치면 나는 가까운 12년 동안 그 누구보다도 예쁨을 독차지한 손녀였다. 그런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안 그래도 무기력했던 마음이 더 허무하고 의욕이 전부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음이라던가 생각이라던가 의지라던가 내 안의 모든 섬이 멸망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좋아하는 여행도 하기 싫고, 사진도 찍기 싫고, 일은 손에 안 잡히고, 사랑하는 남편과는 떨어지기 싫고..

결국 그리하여 일상생활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회사에 알려 쉬게 된 것이다.


현재 한 달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출근을 하고 있지 않다.

그때보다 많이 나아졌다.

약이 조금 늘었지만 그래도 불안증세라던가 세상에 대한 허무감 같은 건 사라졌다.

내가 잘 살아가는 것이 할머니에게도, 또 곁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도 보답하는 길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마미 스나다 감독의 다큐멘터리 '엔딩노트'

'엔딩노트'를 아시나요?

정년퇴직 후 제2의 인생을 준비하던 감독의 아버지는 뜻밖의 소식을 듣는다.

바로 암에 걸렸다는 사실이었는데, 평소 꼼꼼한 일처리로 유명했던 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고서는 엔딩노트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엔딩노트.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자신의 장례식을 준비하는 과정의 기록이다.

"메인 게스트는 나니까"라고 자랑스레 말하던 감독의 아버지는 자신의 장례식을 총감독하기 시작한다.

불러야 하는 사람들, 연락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조의금은 받지 말 것, 장례식을 치르는 곳의 성당을 여러 군데 답사한다던지, 죽기 전에 절대로 찍어주지 않던 야당에 표를 던져준다던지.

죽음을 앞둔 사람이 이렇게나 유쾌할 수 있을까?

이미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일본은 '엔딩노트'가 유행일 정도라고 했다.

사망한 노인중 3~4명이 고독사를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장례절차나 연락해야 할 가족들에 대한 자료가 없었는데 이 엔딩노트를 작성해두면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품위 있는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다나.

https://blog.naver.com/dmlifeway/221000652101

(관련 포스트를 첨부한다!)


그나저나. 내가 잘 살아가는 것이 모두에게 보답하는 길이라는 걸 알면서, 웬 엔딩노트 타령이냐고?

이 영화는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미 5~6년 전에 본 영화였는데 그때는 감독인 딸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봤다면 최근 다시 보니 아버지에게 몰입해버렸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준비를 하면서 과연 아버지는 담담했고, 또 마지막 그 날을 기다렸을까?

어쩐지 나는 엔딩노트를 작성하면 할수록 죽음과 멀어지고 싶은 생각이 들 것 같았다.

버킷리스트와 크게 다를 게 있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엔딩노트를 작성하면 할수록 이런 우울감이나 사라지고 싶은 마음 대신 더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리고, 또, 뭐.

나의 의지로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인생이란 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병에 걸릴 수도 있고 사고가 날 수도 있다. 30대 초반이라고 해서 준비해두는 것이 나쁠 게 있을까?

영정사진은 어떻게 찍고 싶은지, 수의는 어떤 식으로 입고 싶은지, 염을 할 때 화장품은 어떤 걸 쓰고 싶은지, 내 죽음을 절대로 알리지 않길 바라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죽음도 삶의 한 부분일 뿐이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고 잔잔하게 장례식장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달라는 유언을 한다던지, 죽기 전에 이것은 꼭 하고 가야 구천에 떠도는 귀신이 되지 않을 것 같다던지. 와 같은 리스트를 작성할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엔딩(ending) 노트는 엔딩(and-ing) 노트가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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