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5 눈물 젖은 짜파게티, 그 럭셔리한 무용담
“아 코로나 끝나면 우동 먹으러 일본 가고 싶다.” 친구의 말에 웃음이 났다. 그거 무슨 드라마 대사 아니냐며 한참을 웃다가 럭셔리한 무용담을 소환해버렸다. “나는 짜파게티 먹으러 프랑스도 갔었어!”
대한민국 여권이 있다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무비자로 머무를 수 있는 기간은 3개월. 그래서 아프리카 튀니지로 떠날 때도 별다른 비자를 받지 않았다. 3개월이 다다라 불법 체류자가 되기 직전에 비자를 갱신하면 되기 때문이다.
비자 갱신을 위해서는 다른 나라로 떠났다가 다시 튀니지로 돌아오기만 하면 되었다. 우리는 이 여행을 “비자 트립”이라고 불렀다. 떠나온 외국에서 3개월 간 자유의 신분으로 살기 위해 또 어디론가 떠나는 여행이라니, 참 낭만적인 개념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비자 트립”이라는 말을 참 좋아했다.
이탈리아 바로 아래 위치한 튀니지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스페인, 그리고 양국 관계에 따라 하루에도 오고 가는 교통편이 많은 프랑스까지, 다양한 유럽 국가로 떠나기 쉬웠다. 심지어는 저렴하게 구한다면 편도 비행기 표가 겨우 5만 원, 서울에서 시골 할머니 댁까지 가는 KTX 기차표보다 저렴했다.
무명하고 낯선 아프리카 나라에서의 이국적인 생활과 3개월에 한 번씩 돌아오는 유럽 여행의 경험은 달콤했다.
문제는 두 번째 비자 트립을 다녀온 후였다. 반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을 이방인으로 살며 나는 빠르게 지쳐가고 있었다. 달콤했던 외국 생활도 뜨겁게 메마르게 하는 건조한 여름, 한 밤 중에도 열기가 식지 않아 계속되는 불면의 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없는 카페, 말이 통하지 않는 집주인, 하이톤으로 “니하오~!”라고 해맑게 인사하는 현지인들.
그중에서도 가장 본능적으로 힘들었던 것은 바로 한국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튀니지에는 한인 마트는 커녕, 그 흔한 차이나 타운과 아시안 마트도 없었다. 앞집에 갓 태어난 아기 야스민부터 80은 훌쩍 넘어 보이는 집주인 할머니까지, 온 동네 주민이 난생처음 보는 아시아 인이 나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출국할 때 이민 가방의 80%를 차지했던 한국 식재료 (고추장, 된장, 간장, 참기름, 당면, 카레가루, 짜장가루, 김치 한통. 그리고 라면, 짜파게티, 불닭볶음면 겨우 몇 봉) 그중에서도 라면류는 특식이었다.
비를 쫄딱 맞아 서러운 어떤 날, 컨디션이 좋지 않아 엄마가 보고 싶은 어떤 밤, 모두 시험을 통과해서 축하를 해야 하는 어떤 주말에 한 봉지, 한 봉지씩 꺼내 먹었다. 두 번째 비자 트립을 다녀온 뒤 튀니지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그마저도 동이 나 버렸지만.
겨우 시간을 맞춰 아빠와 잘 들리지도 않는 카카오톡 전화를 한 어느 여름날.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었다는 아빠의 말을 듣고 왈칵 눈물이 났다. 윤기가 흐르는 양념과 비빌 때 나는 향기, 입 안을 가득 채우는 맛이 한순간 오감으로 느껴졌다.
너무나도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짜장면이 먹고 싶어서 엉엉 울어버렸다.
“으앙 왜 짜장면 이야기를 해! 나도 짜장면 먹고 싶어! 엉엉 나 한국 가고 싶어! 여기 싫어!” 하고.
그날 이후 빠르게 세 번째 비자 트립을 떠났다. 아직 비자 만료일이 넉넉하게 남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주저 없이 프랑스 행 비행기 표를 샀다. 파리 한인 마트에 가서 짜파게티를 털어오려고!
튀니지에는 없는 스파 브랜드의 신상 옷, 유명한 마카롱, 필수 기념품으로 유명한 약국 화장품 같은 걸로 캐리어를 잔뜩 채워온 이전의 비자 트립과 달랐다.
이번 비자 트립의 목표는 캐리어 가득 짜파게티, 라면, 불닭볶음면을 채워오는 것. 파리 숙소에서 가장 가까운 아시안 마트를 미리 검색하고, 야심 차게 빈 캐리어를 끌고 갔다. 그리고 아마도 그날 파리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표정으로 목표를 달성했다!
튀니지로 돌아오는 날, 비행기 시간을 착각했다. 오를리 공항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공항에서 직원의 도움을 받아 전력 질주해서야 겨우 튀니지 행 비행기를 탔다. 깜깜한 밤, 잔뜩 지쳐 돌아온 내가 문을 열였다. 그러고는 “와 드디어 집에 왔다”라는 말을 했다.
“집에 왔다니” 그 말이 너무 생경해서 깜짝 놀랐다. 반짝이는 에펠탑과 한국 식당에 언제든 갈 수 있는 프랑스를 떠나, 그렇게 싫다고 엉엉 울던 튀니지에 돌아왔는데, 그래도 여기도 내 집이라고 반갑구나. 편하구나.
무려 프랑스에 가서 사 온 짜파게티를 끓여먹으며, 한국이 싫어 떠나온 곳과 떠나온 곳 마저 싫어 또 떠난 곳. 그리고 그럼에도 반가운 나의 튀니지 집과 평생 그리워할 한국 집을 생각했다.
한국이 지겨워 떠나고 싶은 지금, 짜파게티 먹으러 프랑스를 갔었던 일을 다시 생각한다. 짜장면이 먹고 싶어 엉엉 울던 나는 얼마나 귀여웠는지. 짜파게티를 먹으러 프랑스 행 비행기 표를 사는 나는 얼마나 무모하고 또 멋졌는지.
“우리는 기다리며 살지 멋진 순간들만
하지만 우릴 기다린 건 황당한 순간들
하지만 먼 훗날 뒤돌아 보면 모두 럭셔리한 무용담
걱정할 필요 없어 모두 추억이 될 테니”
라는 노랫말을 좋아한다.
짜파게티를 먹으러 프랑스를 갔다는
럭셔리하고 로맨틱한 무용담이라니,
그래 맞다. 이건 방금 끓여내 김이 폴폴 나는 짜파게티처럼 반짝반짝 윤기 나고 향기로운 추억이 맞다.
발은 아프리카, 머리는 유럽, 가슴은 아랍에 있는
튀니지에서의 추억이 더 궁금하다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