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된다는 것은 정말 신기하고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경험이다. 임신을 하면서부터 끊임없이 첫 경험들이 생겨난다. 아침에 눈뜨면서부터 뱃멀미와 같은 울렁거림에 시달리고, 중기가 넘어가면 자다가 몇 번씩 깨어 화장실을 가야 한다. 만삭에는 15킬로가 넘게 증가한 몸을 지탱하는 것만도 힘들다.
하지만 본 게임은 출산 후부터다. 아기는 생후 100일까지 두세 시간마다 깨서 밥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엄마와 아빠는 돌아가며 쪽잠을 청한다. 아이를 다루는 게 어느 정도 손에 익었다 싶으면 이앓이에 성장통의 시기가 온다. 왜 우는지도 모르겠는 아이를 안고 한참 달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우리에게도 오로지 나와 남편만을 생각하면 되었던 2인 가족 시절이 있었다. 남편은 성인이기에 사실 나 스스로만 잘 챙기면 됐었는데. 아이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어른의 손이 필요하다. 아이가 커가면서도 체력적으론 편해질지 몰라도 정신적인 짐은 더욱 많아진다고 한다. 이미 나와 남편은 각각 첫째와 둘째를 도맡아 챙기고, 각자의 삶은 각자도생에 들어간 지 오래다.
하지만 누군가 ‘다시 태어나도 아이를 갖고 싶으냐’고 물으면 나는 아마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존재 자체로 사랑스러운 아이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물론 있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는 과정은 나 스스로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어주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연애를 하면서 ‘당신은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요’라고 한다던데. 나는 아이를 가지면서부터 이 구절에 깊이 공감했다. 사실 연애시절부터 남편은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한다기보다는 내가 나일 수 있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이는 달랐다. 나를 마치 세계 전체인양 바라보는 아이의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볼 때면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아이에게 본보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정말 생소하고도 따뜻한 기분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9년 차, 책임감만큼은 넘친다고 자부하던 나지만, 이렇게 큰 책임감을 느낀 건 난생처음이었다. 나는 틈이 나면 서점에 가서 육아책부터 아동발달심리학개론서까지 수많은 책들을 탐독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한 시작이며 가장 중요한 단계임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아이들이 커가는 걸 보면서 이맘때의 나는 어땠을까를 떠올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의 내면 아이를 마주치게 되었다. 그 아이는 내 외관이 큰 만큼 같이 자라지 못하고 아직 아이로 남아있었고 상처 받아있었다. 그 아이를 만나고 보듬고 수용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렇게 나를 온전히 수용한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엄마가 되었다.
절대적인 시간의 부족으로부터 찾아오는 근본적인 질문들도 마주할 수 있었다. 보통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은 사실 사전적인 ‘병행’의 의미라기보다는 버텨내는 것에 가깝다. 일도 육아도 잘 안 되는 것 같은 기분에 자괴감이 들기도 하는 게 워킹맘이다. 그런 과정은 자연스럽게 나로 하여금 일과 육아 사이에 조화를 어떻게 맞출 것인지부터, 궁극적으로는 아이와 보낼 시간을 배분해가며 하는 ‘일’에서 내가 정말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아마 나는 아이를 갖지 않았다면 이 시기에 이토록 치열한 고민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하고, 내 삶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어쩌면 더 빠른 시기에 치열하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건 ‘아이’라는 존재였다.
항상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 고맙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에 덧붙여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주고 내 인생의 의미를 더 깊게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를 준 아이들에게 정말 고맙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도, 난 엄마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