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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녕 Dec 03. 2020

다시 한 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대학교 2학년, 남자친구와 헤어졌을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귀엽고 우스운데, 당시에는 이별의 슬픔에 불면증까지 와서 하루에 3시간밖에 못 잤었다. 어디 그것 뿐인가? 길을 걷다가 울고, 밥을 먹다가 울고, 심지어 기말고사 실기 시험으로 가야금을 뜯다가 울고, 한 달 동안 밥도 못 먹어서 몸무게가 44kg까지 줄었었다. 전 남자친구에게 전화하고 싶을 때 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는 고작 1년 사귄 남자친구하고 헤어진건데도 이렇게 힘든데 엄마는 이혼하고 안힘들었어?”

  “왜 안 힘들어? 인생이 완전히 폐허가 된 것 같았지.” 


  하지만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연애를 했고, 엄마도 다시 결혼을 했다.      



  엄마가 겨우 2주 동안 조금씩 아프다가, 혼수상태이다가, 결국은 죽기까지를 모두 겪었을 때 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시달렸다. 일주일 전만 해도 엄마는 수박을 씹어 먹었는데, 오늘은 죽은 사람이 된 것이다. 고작 2주만에 나는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우주 어딘가로 뚝 떨어져 나와 있었다. 

  삶이라는게 이렇게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니, 허무함이 내 뼈를 파고들었다. 어차피 죽을 텐데, 도대체가 사는게 의미가 있기는 한가?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고, 썩어 없어지고의 반복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이 들면 들수록 나의 이 의미 없는 숨을 당장이라도 끊어지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지상으로 올라와 다시 잘 살고 있다. 전 편에서는 '지금 '잘' 살고 있는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살고 있다.'고 말했지만, 지금은 확실히 말 할 수 있다. '잘'살고 있다고.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이다.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굴러간다. 모든 것은 죽고, 모든 것은 다시 꽃피어난다. 모든 것은 꺾이고, 모든 것은 새로이 이어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고, 모든 것은 다시 인사를 나눈다. 영원 회귀의 무상함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이 ‘긍정’이다. (중략)

  허무주의의 원천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영원 회귀를 ‘다시 한 번!’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에게 고유한 ‘용기’이다.


  또 다른 부분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건강한 자에게도 원한의 감정이 있기는 하나 자신의 적, 자신의 재난, 자신의 병까지도 질질 끌며 무겁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형성하고 치유하고 망각할 수 있는 힘을 넘치게 지닌 강하고 충실한 인간이기 때문이다.(중략)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한 모욕과 비열한 행위를 기억하지 못했고, 이미 잊어버렸기 때문에 용서할 수도 없었다. 도대체 이 지상에 진정 적에 대한 사랑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러한 인간에게서만 가능할 것이다. 


  만남과 헤어짐,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는 영원의 회귀에 허무함을 느꼈지만 나는 인간이기에 그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있었고, 매일 마다 열심히도 ‘다시 한 번!’을 외쳤다. 이곳에 다 털어 놓을 수는 없지만, 엄마의 죽음과 함께 가족 간의 분열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충실하고 건강한 인간이기에 이것 또한 스스로 치유하고 망각하고자 노력한다. (나중에 해결이 되면 글로 쓸게요. 글로 쓰고 싶은데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어 지금은 쓸 수가 없어요.) 


  나는 미와 추, 선과 악, 행복과 불행을 넘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긍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비로소 엄마의 죽음, 이후 이어진 여러 분열들이 더 이상 나를 상처 입힐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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