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래된 연인이 있다. 눈빛만으로 다음 행동이 예측 가능한. 떡볶이 다음은 아이스크림이고, 휴일 목욕 다음은 낮잠이라는 걸 다 알고 있는. 근데 오늘은 여자의 손님이 여자를 화나게 했다. 하루종일 꾹 참다가 퇴근 후 둘이 자주 가는 껍데기 집에서 만났다. 기분이 안 좋은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남자가 말 없이, 하지만 다정하게 껍데기와 삼겹살을 굽는다. 껍데기가 동그랗게 말리며 톡 튀고, 삼겹살이 육즙을 뿜으며 지글지글 탄다. 남자는 고기 굽기 만랩이다. 익은 삼겹살을 후 불어 소금에 찍어서 여자 입에 넣어 준다. 기분은 더러워도 삼겹살은 맛있는 여자는, 표정이 살짝 풀리며 소줏잔을 들고 남자를 본다. 눈들이 서로 닿는다. 잔들도 서로 닿고. 남자가 웃는다. 여자의 무례한 손님은 그때부터 안줏거리가 되어 여자의 입 속에서 쫀득한 껍데기와 함께 씹힌다. 여자의 긴 성토와 중간중간 남자의 짧은 맞장구. 남자와 여자의 섞인 웃음 소리와 잔 부딪치는 소리. 얼굴이 붉어진 여자의 목소리가 커지며 거친 말들이 나오고. 맑게 찰랑거리는 소줏잔 너머 남자의 따뜻한 시선. 여자의 얼굴이 점점 밝아진다.
2. 오랜만에 동네에서 부x친구 둘이 만났다. 일요일 늦은 오후. 무릎 나온 추리닝 바지에 쓰레빠 차림. 하루 종일 뒹굴어서 떡진 머리에 모자를 눌러 쓰고. 시장 구석에 있는 허름한 좌식 소줏집. 쿰쿰한 구석 냄새와 맵고 기름진 안주 냄새와 발냄새와 술냄새들이 섞여 있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무슨 안주든 뚝딱 해내는 이모님이 계시고. 깊은 생각없이 튀어나오는 농담과 거칠지만 익숙한, 이 새끼 저 새끼가 섞인 장난들이 오가고. 더러는 오랫동안 어색하지 않게 말이 끊기고. 아무말 사이에 오늘 못 나온 친구 얘기와 옛날 얘기와 여친 삐진 얘기, 그리고 때로는 내일 출근 생각과 한숨. 아침에 대충 주워먹은 빵쪼가리가 다라서 배가 비어 있다. 테두리가 바싹하게 굽힌 해물파전과 작은 뚝배기에 노랗게 부푼 계란찜. 버너 위에서 끓는 조개탕 옆, 하얀 플라스틱 접시 위에 따끈한 두부 김치. 소주병이 한 병 두 병 비어가고, 안주들이 사라지는 동안 수도 없이 소줏잔이 서로 부딪친다. 얼큰하게 취해서 한 명은 모자를 벗고, 한 명은 걸치고 있던 남방을 벗고.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더요.
3. 혼자 사는 여자가 오늘 자정 마감인 원고 때문에 어젯밤부터 쪽잠만 자며 하루종일 노트북만 마주하고 있다. 밤 11시 50분. 마침내 원고 전송. 30분 전에 단골집 'ㅇㅇ통닭'에서 시킨 반반치킨 도착. 냉장고에서 며칠 전에 킵해 놓은 소주를 꺼내고 티비 앞 테이블에 세팅을 시작한다. 평소에 나를 위했던 예쁜 그릇 이딴 건 다 필요없다. 귀찮아서 대충 배달 온 종이 박스 뚜껑만 찢는다. 치킨 다리 하나를 입에 문 채 엄마가 갖다 준 깍두기를 아무 그릇에 퍼담는다. 아무리 급해도 통닭엔 깍두기라는 배움을 거스를 순 없다. 하루 종일 배고플 때 대충 주워먹기만 해서 텅텅 빈 위장은 치킨의 입장만을 기다리고 있다. 티비로 유튜브를 켜고 구독 중인 영화리뷰 채널을 정주행한다. 눈 앞엔 티비. 입 속으로는 통닭과 깍두기와 소주가 사이좋게 차례차례 입장하고 있다. 치킨의 느끼함을 맑고 투명한 소주가 깔끔하게 잡아준다. 입안에 깨끗하게 퍼지고, 목구멍으로 차갑게 넘어가는 소주.소주병이 점점 비어간다. 빨개진 얼굴로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고. 통닭으로 시작된 소주맛은 아저씨처럼 들이키는 컵라면 국물로 완벽하게 완성된다.
처음 소주를 마셨을 땐 너무 맛이 없어서 깜짝 놀랐다. 맛이 없다기 보단 음식이 아닌 느낌. 알콜램프를 들고 마시는 기분이었다. 대체 이 맛없는 걸 왜 저리 많이 마시나? 생각했었다. 먹다보니 적응이 되긴 했지만 맥주나 와인같은 부드러운 술들을 이기지 못했다. 그땐 술의 참맛을 몰랐다. 취하는 기분이 재밌어서 마셨던 것 같다.
학교를 졸업하고 돈 버는 사람이 되면서 소주맛을 조금씩 알 것 같았다. 맥주나 와인, 위스키가 따라갈 수 없는 소주 특유의 분위기. 열일해서 피곤이 온몸을 내리 누르는 날, 일을 끝내고 순댓국에 소주 한 잔을 하노라면 인생이 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저씨 식성이다 보니 소주 안주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거의 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이다. 생선회, 산낙지, 해장국, 닭똥집, 곱창전골, 순댓국, 닭발, 막창, 삼겹살...등등. 먹는 것과 말하는 걸로 스트레스를 푸는 타입이다 보니 이런 음식들과 그날 하루를 섞은 안주를 씹으며 소주 한 잔으로 마무리하는 날들이 많았다.
이제는 소주를 술로 먹지 않는 고레벨에 이르렀다. 점점 주량이 줄더니 이제는 한 번에 소주 석 잔을 못 넘긴다. 보통은 한 두 잔으로 입을 적시는 정도로 적게 마시는 사람이 돼 버렸다. 적게 마셔도 기분은 충분히 낼 수 있는 음주의 프로. 심지어 이젠 술이 음식에 곁들여 음식맛을 돋우는 '감미료' 같은 것이 되었다. 소주의 믹스매치 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한 가능성의 소주. 어떤 음식도 소주와 함께라면 두 배 이상 더 맛있다. 요즘은 맵삭한 오일 파스타랑 소주를 같이 먹는 것에 중독돼 버렸다. 와인보다 훨씬 잘 어울린다. 오일파스타를 한 포크 먹고 소주로 입을 적시면 뭔가 그 기름진 맛이 깔끔하고 탄력있게 잡히면서 파스타 면발이 훨씬 감미롭게 넘어간다. (다만 소주가 느끼함이나 달달함같은 걸 잘 잡아주기 때문에 뭘 먹어도 더 많이 먹게 돼서 점점 돼지가 된다는 부작용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오늘도 비싸고 예쁜 다른 술들을 제치고 맑고 투명한 나의 소주들이 귀엽게 냉장고 한 켠에 줄 서 있다. 그냥 지나치기가 힘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