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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Apr 03. 2021

사비나의 북살롱

여긴 꼭 가세요!!





서귀포 남원 태흥해안로. 해변을 따라 해가 보이는 쪽으로 쭈욱 걷다보면 코발트 블루로 칠해진 목조 주택이 하나 보인다. 그 앞에 세워진 조그만 입간판에는 레몬색으로 '사비나의 북살롱 골목을 따라 200M'라고 적혀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글씨체다. 화살표 방향엔 골목이 하나밖에 없어서 길치들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길을 잘 못 찾고 늘 헤매는 나는, 도착 전부터 단순한 길 끝에 자리한 그녀의 살롱이 마음에 든다. 꼬불꼬불한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가까이 들리던 파도 소리가 멀어지며 들릴 듯 말 듯할 무렵, 하늘색 페인트가 은은하게 칠해진 아담한 이층집이 주위에 널찍한 유채꽃밭의 주인인 양 느긋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제주도에 이런 데가 있었다니.


아까 골목 초입에서 봤던 화살표 밑 글씨와 똑같은 글씨체와 색깔로 '사비나의 북살롱'이라고 적힌 조그만 문패가 문 앞에 걸려 있고, 그 아래에 잎이 큼직한 유칼립투스로 만들어진 풍성하고 큰 리스가 걸려있다. 마른 유칼립투스 향이 향긋하다.


다른 세계에 들어온 느낌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누가 봐도 이곳의 주인 같은 여자가 눈을 반짝이며 인사한다. 웃음이 살짝 묻은 경쾌한 목소리에 기분이 좋아진다. '프라하의 봄'에 나온 사비나를 상상했던 나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사비나에 잠깐 놀란다. 새까만 눈동자처럼 새까만 단발 머리.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로 웃는 표정이 시원하다. 건물에 칠해진 페인트 색보다 조금 더 진한 하늘색 오프숄더 크롭탑에 그보다 조금 진한 바다 빛깔 맘핏 청바지를 입고 있다.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여자다.


그녀가 추천하는 이디오피아 모카시다모를 주문하고 여기저기 사진을 찍으며 둘러 본다. 은은한 커피향과 복고적인 느낌이 나는 째즈 피아노 소리가 편안하다. 벽마다 큰 창이 있어 어디로 눈을 돌려도 유채가 보인다. 딱 한 쪽만 창이 없는데, 거의 벽 전체 크기 만한 거대한 책장이 벽인 양 자연스럽게 서 있다. 살 수도 있고, 빌릴 수도 있는 책이 색깔별로 꽂혀 있는 게 인상적이다. 찾고 싶은 책은 사비나에게 말하면 바로 찾을 수 있는 모양이다.


책과 커피만 파는 줄 알았더니, 아닌가 보다. 파스타를 비롯한 식사와 안주, 술도 판다. 카운터 앞 쇼케이스엔, 얼핏 봐도 스무 가지는 넘어 보이는 맥주들이 보인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봤는데, 맥주 아래 칸에 소주도 몇 병 있다. 와인이랑 위스키도 어딘가에 있나 보다.


책장 한 켠엔 예의 그 귀여운 글씨체로 이 딴 세계 같은 공간에 대한 안내문이 적혀 있다.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운이 좋으면 사비나의 피아노 연주를 들을 수 있고, 목요일과 토요일에는 술마시며 수다 떠는 소설 읽기 모임이 있다고 한다. 화요일 아침에는 사비나의 플라워 레슨도 있고, 레슨이 끝나면 꽃을 살 수도 있다고 한다. 가끔 진짜 운이 좋으면 그녀의 애인이 잡아오는 싱싱한 생선회나 무늬 오징어를 공짜로 맛 볼 수 있다는 부분을 보니 군침이 돈다. 그리고 이 모든 스케줄은 사비나의 기분에 따라 전면 취소될 수 있으니, 반드시 공식 인스타 대문에서 그날의 일정을 확인하고 오라는 멘트가 역시나 귀엽게 적혀 있다.


그녀는 카운터 쪽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마주하고 무언가를 쓰고, 무언가를 생각하고를 반복한다. 굉장히 골똘한 표정인데, 한참을 쳐다 봐도 시선을 못 느끼는 것 같다.


오후에 취재 스케줄만 없다면, 식사도 하고 술도 마시며 좀 있으면 시작될 독서 수다 모임을 엿듣고 싶어진다. 바쁜 일정을 원망하며 나는 언제 그녀처럼 경쾌한 표정으로 커피를 내리고 노트북을 쳐다볼 수 있을까 싶어 조금 쓸쓸해진다.



사비나의 북살롱.

여름 휴가엔 근처에 숙소를 잡아 매일 와봐야겠단 달콤한 결심을 하며 문을 닫고 나왔다. 다시 마른 유칼립투스 향이 나고,  눈 앞에 흐드러진 유채가 5월의 따뜻한 바람에 하늘거린다.


아예 안 와본 사람은 있을지라도, 한 번만 와본 사람은 없겠군.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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