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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Jan 31. 2021

자기 세계의 진실을 말하려는 자, 소설가

<토지> 서문을 다시 보고.






나는 묘사 성애자였다.


요즘 글을 쓰며 '묘사'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나는 감각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묘사하는 것'을 참 즐거워하고(꼭 글이 아니라 말이라도), 내가 감지한 어떤 것을 정확히 묘사해서 전달하고 그것을 상대가 정확히 알아듣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 묘한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는 것을 요즘 들어 종종 깨닫게 된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탁월한 묘사'라는 것이 이야기의 진실에 얼마나 큰 힘을 불어넣어 그것을 탄탄하게 하는지에 대해서도 부쩍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일상에서도 최대한 오감을 열어 놓고 섬세하게 외부를 느끼려 하고, 내 안에서 어떤 미묘한 감정들이 떠다니고 있는지 예민하게 놓치지 않으려 한다.



토지 1권을 다시 펴 보았다.


그러면서 떠오른 사람이 바로

소설가 박경리 선생님. 그리고 그 분의 대작 <토지>.



'이 분은 정말 인간을 보는 눈과 그것을 묘사로 재현하는 붓이 탁월하구나. 어쩜 이리 잘 보시고, 잘 쓰셨나.'


하는 감탄을 연발하며 <토지>를 읽던 기억이 났다. 10권 정도까지 봤었나? 바쁜 일이 생겨 중간에 끊기고 흐지부지 읽지 않고 둔 지 일 이 년이 지난 것 같다.


다시 펼친 <토지>. 서문을 읽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더군다나 지금은 살아 있지도 않은 사람의 영혼이 가까이 와 있는 것처럼 절절한 진심이 생생하게 가슴에 닿았다.


자기 세계의 진실을 말하려는 자, 소설가


가장 최근에 쓴 서문(2001년)에는 '토지문학제'라는 행사에 초대되어 연단에 올라 말씀을 하시다가 눈물을 쏟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별안간 목이 메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예상치 못한 일이 내 안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세월이 아우성치며 달겨드는 것 같았다. 뚝이 터져서 온갖 일들이 쏟아져내리는 것 같았다. 아 이제야 알겠구나. <토지>를 쓴 연유를 알겠구나.

아마도 그(박경리 선생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는 누군가의 도구가 아니었을까. 전신이 떨렸다. 30여 년이 지난 뒤에 작품의 현장에서 나는 비로소 <토지>를 실감했다. 서러움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삶을 잇는 서러움이었다.

고난의 역정을 밟고 가는 수없는 무리. 이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라면 이상향을 꿈꾸고 지향하며 가는 것 또한 우리네 삶의 갈망이다. 그리고 진실이다.


지리산의 한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문득 당신이 왜 토지에 그토록 매달렸는가에 대한 답을 알 것 같아 서러움이 복받치신 거였다. 이 세계의 진실을 말하는 '도구'라는 자각을 하셨던 거다. 도구. 굉장히 겸손한 표현이지만, 이 말에는 글 쓰는 사람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나는 비록 구석에서 이제야 한 줄 한 줄 시작해 보려 하는 작가 지망생에 불과하지만, '거장의 진심'이 그대로 다가와 내 가슴을 뜨겁게 했다.


아무 것도 아닌 내가 세상에 나올지도 모를 이야기를 만들어 쓰는 것이나

문단의 거장이 생을 바쳐 대작을 쓰는 것이나


소설을 쓰는 것은 자기가 인식한 세계의 진실을 표현하고 싶은 몸부림이라는 걸 온몸으로 알 것 같았다.



건널 수 없는 강처럼 허망한 언어의 한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세기에 쓰신 또 다른 서문(1973년)에는, 언어의 한계를 인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서 헤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또 이렇게 절절하게 써 놓으셨다.


이 책은 소설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한 인간이 하고많은 분노에 몸을 태우다가 스러지는 순간순간의 잔해다. 잿더미다. 독자는 이 소설에서 울부짖음도 통곡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일 따름, 허구일 뿐이라는 얘기다. 진실은 참으로 멀고 먼 곳에 있었으며 언어는 덧없는 허상이었을 뿐이라는 얘기다. 마찬가지로 진실은 내 심장 속 깊은 곳에 유폐되어 영원히 침묵한다는 얘기도 되겠다. 칠팔 년 전에 나는 어느 책에다 언어가 지닌 숙명적인 마성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진실이 머문 강물 저켠을 향해 한치도 헤어나갈 수 없는 허수아비의 언어, 그럼에도 언어에 사로잡혀 빠져날 수 없는 것은 그것만이 강을 건널 가능성을 지닌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전율없이 그 말을 되풀이할 수 없다.


그렇게 오랜 세월 소설로 이 세계의 진실을 말하기 위해 평생을 다 썼음에도, 언어라는 것이 결국은 심장 속 깊은 곳에 유폐된 진실을 다 말해주지 못했다고 하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이 진실을 포착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놓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신다.

진심을 말씀하셨지만, 독자로서 말하자면 너무 겸손한 표현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 울부짖음과 통곡이 수시로 들린다. '사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인가.' 하는 한탄이 자주 나온다. 이 소설엔 수많은 삶의 진실이 날 것 그대로 담겨 있다.

끝끝내 자기가 가진 도구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최대한 마음속 진실에 가깝게 그것을 그려내려는 한 예술가의 진심이 나를 전율하게 했다.



삶의 심층을 가리는 무례하고 천박한 상식의 세계


자신을 향한 세간의 평가나 해석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사람들은 수월하게 행과 불행을 얘기한다. 어떤 사람은 나를 불행하다 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행복하다 한다. 전자의 경우는 여자의 운명을 두고 한 말이겠고 후자의 경우는 명리를 두고 한 말이 아니었나 싶다. 혹은 잡사에서 손을 떼고 일에 전념하는 것을 두고 한 말인지 모르겠다. 그들 각도에서 본 행, 불행에는 각기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때론 노여움을, 때론 모멸감을 느끼며 그런 말을 듣곤 한다.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무궁무진한 인생의 심층을 상식으로 가려버리려는 것이 비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류되는 불행, 그렇게 가치지어지는 행복이라면 실상 그 어느 것과도 나와는 별 인연이 있을 성싶지 않았다. 분명 환난을 겪는 욥에게는 행복의 비밀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장의 붓으로도 다 그려낼 수 없는 한 인간의 삶과 진실을 행복이나 불행 같은 단편적인 말로 가려버리려는 세상의 상식에 대해 모멸감을 느끼셨다고 한다. 이런 세상의 상식에, 그 칼질에 대한 부정과 저항으로 평생을 바쳐 소설을 써 온 한 예술가의 조용하고 겸손한 일갈. 속이 시원했다. 천박한 세상을 관조하는 한 예술가의 고결한 존엄을 느꼈다.




스무 살 때부터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이야기를 쓰는 사람을 꿈꿨다.



그것은

세상을 모르는 어린 여자의 달뜬 로망이기도 했고

세상을 알아가며 늙어가는 여자의 달콤한 핑계이기도 했다.


이제 그것은 뜬구름이나 핑계를 넘어섰다.

박경리 선생님의 서문에서 느껴지는 저런 존엄과 품격을 좇는 일이라면 지금으로썬 평생을 다 써도 괜찮다는 호기로운 마음이 든다. 내가 뭐가 되든 안되든 간에. 설사 아무 것도 안 된다 해도.



김영하 작가가 어느 책에서 소설을 쓰는 것이 가장 즐겁고, 그보다 더 즐거운 것이 완벽한 소설을 읽는 것이며  그것들보다 더 즐거운 일을 알지 못한다고 한 적이 있었다. (정확히 인용하고 싶었지만 이 문장을 찾지 못해서 기억나는 대로 적은 점, 양해 부탁해요. 혹시 어디 있는지 아시는 분 댓글로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가장 즐거운 일이기 때문에 주저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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