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비나 Feb 28. 2021

좋을 때 '좋아요'라고 하는 게 좋지만

내 오만과 편견에 대한 성찰




어제 마지막 수업은 혜윤이 수업이었다. 재작년 이맘때부터 토요일 8시엔 항상 혜윤이를 만났다. 이제 이 아이가 고3이니, 재수를 하지 않는다면 내년에는 못 볼 것이다. 부쩍 이 아이가 내 앞에서 자기 얘기를 많이 한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꼭 친구처럼 요 며칠 어땠는지도 얘기한다. 처음부터 이 아이와 친한 건 아니었다.


나: 나 혜윤이랑 너무 안 맞는 것 같아. 불편해.

애인: 그래도 어떡해. 열심히 가르쳐 봐.

나: 당연히 열심히 가르치긴 하지. 근데 성격은 안 맞아. 난 예린이 같은 애가 좋단 말이야.

애인: 그래도 계속 그렇게 수업을 하는 거 보면 걘 자기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 아닐 걸? 그냥 공부하려고 다니는 거지.


두어 달 전 혜윤이 수업에 대해서 애인과 나눈 대화이다. 혜윤이는 나와 성격이 비슷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확실히 표현하고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지만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 아무리 비슷해도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오버를 못하는 낯가리는 성격의 두 사람이다 보니, 우리는 굉장히 오랫동안 적당히 거리가 있는 사이로 지냈다. 근데 부쩍 이 아이가 요 몇 달 사이에 조금씩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가까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을 뿐, 마음이 따뜻하고 의리 있는 아이였다. 나는 이 아이가 좋아졌고, 어른으로서 먼저 마음을 열어 주지 못한 것에 좀 미안해졌다.



나는 호오가 분명한 성격이다. 그것을 정확히 표현하려는 마음 때문에 때때로 단호해진다. 어릴 때 엄마랑 길을 가다가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지 않자 바지를 벗고(또라이?ㅋㅋㅋ) 길에 누워 버렸다고 한다. 한 번은 "너 그렇게 할 거면 나가!" 하고 엄마가 쫓아냈는데, 진짜 나가서 한참이나 걸어가고 있는 나를 겨우 쫓아가서 다시 데려왔다고 한다. 나는 기억나지 않는, 서너 살 무렵의 일들이다.


이런 성격은 일면 나를 자유롭게 했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 나는 교회에 다녔다. 신앙은 없었지만 엄마가 다녀서 그냥 따라갔다. 설교 시간에는 유체이탈 신공으로 혼자 딴생각의 나래를 펼쳤고, 기도 시간에도 자주 눈을 떴다. 집중이 잘 안 됐다. 중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 교회에서 수련회를 갔을 때였다. 밤늦게 다 같이 모여 기도를 하는 시간이었다. 큰 교회라 몇 백 명이 큰 운동장 같은 곳에 모였다. 사람들은 기도에 심취해서 울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우니, 아이들도 따라 울었다. 나는 원래 웃음도 눈물도 많은 성격이다. 근데 그때 나는 전혀 눈물이 나지 않았다. 내가 착하게만 살진 않았지만, 그렇게 울면서 회개할 잘못을 하지도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하나님을 만났다고 했지만, 나는 분명히 하나님을 보지도 만나지도 않았다.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열띤 대화에서 소외되어 나는 그냥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엄마에게 솔직히 말했다. 나는 하나님을 모르겠다고. 잘못한 게 있다면 내 잘못 때문에 상처 받은 사람에게 사과하고 싶고, 하나님한테 회개하고 싶지 않다고. 교회에 가면 하나님을 믿는 척하며 거짓말을 하는 게 싫다고. 엄마는 당황하며 알겠다고 하셨다. 이후 나는 자유로워졌다. 일요일 아침이면 이불속에 누워서 '영심이'나 '날아라 슈퍼보드' 같은 만화를 보며 히히덕거렸다. 무엇보다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가장 좋았다.

(특정 종교를 폄하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의 종교와 진실한 신앙을 존중합니다. 다만 신앙도 없는 사람이 교회에 가서 물을 흐렸던 것을 반성합니다.)


솔직하게 호오를 표현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은 이후에도 숱하게 일어났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사람을, 남자를, 장소를, 물건을, 음식을 착착 잘도 선택하며 나의 내면에 쌓아 왔다. 동시에 내가 싫어하는 일을, 사람을, 남자를, 장소를, 물건을, 음식을, 휙휙 잘도 재껴가며 지금의 내가 되었다.






이런 식의 견고한 테두리가 나를 행복하게만 했을까?


나는 선한 사람들에게 약하다. 내가 애인을 오래도록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우리는 '비굴하지 못하고, 진실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점이 닮았다. 닮기만 했다면 그를 좋아할 순 없었겠지. 나 같은 남자라......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ㅋㅋㅋ 내 애인은 가진 건 별로 없지만(내 기준 말고 세상의 기준으로), 아무것도 없을 때도 내게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내 견고한 테두리와 뾰족한 모서리를 동그랗게, 말랑하게, 흐물흐물하게 해 줄 수 있는 선함. 그걸 가지고 있다. 내게는 없는 것이다.



종종 그런 사람들을 만난다. 내 견고한 테두리를 무르게 하는 선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내 오만을 허물고 그 안에 아주 조금만 남아 있는 포용력을 꺼내 준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조그만 포용력이 고개를 내밀 때, 내가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그 행복은 생각보다 큰 것이라서 호오를 분명히 표현할 때와 비슷할 정도이다. 아니, 그것과 좀 다른 차원으로 나를 기쁘게 한다. 더 예뻐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종종 혜윤이 같은 아이들을 만난다. 내 호오의 장벽이 때론 편견을 만들고, 사실은 내가 좋아하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많은 것들을 놓치게 하지는 않았는지. 내가 그토록 자신만만하게 선택한 것들과, 내가 그토록 가차 없이 내 삶에서 제외시킨 것들이 정확하게 진짜 내 '호오'가 맞았던 것인지. 좀 더 선한 눈으로 바라보았다면, 더 좋은 것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을 텐데, 내 딱딱한 테두리가 내 눈을 가린 것은 아니었는지.


내가 좋아하는 선한 사람 중 한 분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


나: 선하고 부드러운 사람들을 만나면 견고한 테두리가 녹더라고요 저는.^^

선한 사람: 으흠 이해했어요. 내부는 단단하지만 범퍼 정도는 조금 찌그러드는 걸 허락하시는 분이시군요. 강하고도 연하십니다.

나: 오호 아시는군요. 범퍼는 찌그러지라고 있는 거죠. ㅋㅋㅋ


유럽에 가면 범퍼가 닿도록 차를 따닥따닥 붙여서 주차를 해 놓은 걸 흔하게 볼 수 있다. 문콕 당할까 봐 변태 주차를 일삼는 나에게는 문화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범퍼가 좀 찌그러졌지만 예쁜 차들은 그래도 예뻤다. 찌그러진 범퍼가 이쁜이들의 미모를 못 가렸다. 찌그러져도 못생겨질 염려가 없으니, 저 차들의 오너들은 얼마나 편하고 좋을까. 오히려 낡은 범퍼가 오래된 차의 빈티지함과 잘 어울려 차를 더 예쁘게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걸 본 후로 엄마가 세차 좀 하라고 하면, 예쁜 차는 더러워도 예쁘다며 세차를 일 년에 세 번도 하지 않는다.


영원한 건 절대 없나 보다. 내 단호한 성격도 이런 식으로 조금씩 변해 가고 있다. 범퍼가 물러서 기스가 나고 좀 찌그러져도 그 안에 내 영혼은 여전히 견고하다. 찌그러져서 더 멋진 아테네 거리의 구형 미니 쿠퍼처럼, 내 영혼은 겉이 말랑해져서 더 예뻐질지도 모른다.



작가의 이전글 모두가 백설공주가 될 수 없는 세상에서(에필로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