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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Mar 02. 2021

2세 계획

분신을 낳고 싶은 본능





'2세'와 '계획'.


'2세'라는 말도, '계획'이라는 말도 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우선 적어도 오늘까지는 자식을 낳을 계획이 없다. 그리고 갑자기 내일 자식을 낳아야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나는 변덕스럽고, 그 변덕을 존중하여 계획 세우기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 때문이다. 벼르던 여행을 갈 때에도 가고 싶은 곳 몇 곳만 찍어 두고 닿는 대로 여행하는 편이다. 계획대로 되어 안도하는 마음보다 뜻밖의 이벤트가 주는 짜릿함을 아무래도 나는 더 즐기는 편이므로.



이것은 내가 '낳고 싶은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미친 사람 같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가 써 놓은 글을 읽는 것을 남이 써 놓은 글을 읽는 것만큼이나 좋아한다. 여기 브런치에 발행해 놓은 글뿐만 아니라, '작가의 서랍' 속에 숨겨 둔, 퇴고하지 않은 알몸의 초고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이런 '자기 읽기'를 즐기는 것은, 잘 만들어 놓은 자기의 명작을 보며 자찬하는 조각가의 마음보다는, 못생긴 구석까지 나를 쏙 닮은 내 자식을 보며 기뻐하는 엄마의 마음에 가까운 것이다.


나는 내가 낳아 놓은 글을 사랑한다. 그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젊고 팽팽한 얼굴을 찰칵찰칵 찍어 놓은 사진들처럼 소중하다. 나는 내 지나가 버린 영혼을 포착해 놓은 그 사진들을 보며, 다시 오지 않을 생각들을 그리워하고, 애써 조각이라도 남겨 놓은 것에 안도하고, 그것에 옷을 잘 입혀 세상에 내어 놓을 방법을 궁리하는 것에 중독되었다. 내 나름으로 나를 아끼는 방식이다. 나를 닮은 사진들에 옷을 입혀 세상에 보였을 때 타인들이 찬사를 보낼지는 그다음의 문제다. 옵션이다. 일단 찍어 두는 것 자체만으로 나는 행복할 수 있다. 기본적인 즐거움은 확보된 셈이니, 옵션에 보다 관대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렇다고 간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글은 내가 가장 낳고 싶은 것이고, 그다음으로 낳고 싶은 것이 있냐 하면


나와 그를 닮은 아기다.


글이든 아기든, 나는 나만 낳을 수 있는 것을 낳고 싶은 것이다. 기껏 애를 쓰며 살아도 멀리서 보면 남과 다를 바 없고 그마저 흔적을 남기기 어려운 허망한 삶에서, 누구든 자기만이 남길 수 있는 분신을 꿈꾼다. 그것은 본능에 가까워서 끊임없이 달콤한 상상을 거듭하게 하고, 결국 둘 중 무엇이든 낳을 수밖에 없도록 한다. 집요한 본능이다.


글과 아이는 일면 다르기도 하다. 앞서 말했듯, 글은 영혼을 찍어 둔 사진 같은 것이다. 나 자체인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나에게서 나왔지만 나와 다른 영혼으로 커 갈 것이다. 나와 닮았으나, 나와 다른 색깔로 채워지는 그 영혼을 가까이서 보는 것은 분명 내가 낳은 글을 보는 것과는 다른 감격일 것이다. 그것을 상상할 때, 나는 미련을 말끔히 버리지 못한다. 내가 매일 보는 아이들은 열네 살에서 열아홉 살까지의 중고등학생들이다. 초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작은 얼굴들은 시나브로 자라고 자라서 빛나는 젊음이 되어 나를 떠난다. 몸이 자라는 것과 동시에 영혼도 함께 성숙해서 멋모르고 반짝이던 그 예쁜 눈에 생기와 주관이 더해지는 그 과정을 지켜볼 때, 나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을 맛본다. 그 좋은 장면은 내가 그 아이들에게 주는 것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비싼 것이어서, 나는 어떻게든 대가를 지불하고 싶어 없는 지혜의 주머니를 애써 뒤진다. 너무 보기 좋아, 뭐라도 주고 싶어 지는 마음이다.


'초록 ' 작가님, '아빠 민구' 작가님, '수호' 작가님 , ’밍이작가님’, ‘김그늘작가님(구독하는 작가님들  육아 글을 자주 쓰시는 분들인데,, 쓰고 나니  떠올라 수정했어요.^^) 같은 육아나 가족 카테고리의 작가님들을 구독하는 이유도  때문이다.(물론 글감과 무관하게  분들의 글은 훌륭하다.) 나는 자라나는 아이들의 깨끗한 눈과 키우는 사람들의 따뜻한 눈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아빠 제비가 둥지 속의 엄마 제비와 새끼 제비들을 품는 것처럼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그것에서 좋은 에너지를 많이 얻는다. 딱히 내가  것은 없어서  미안한 마음이다. 정말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전혀 관계없는  같은 사람도 좋은 것을 얻어 간다고,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며칠 전 동생의 남친이 어플로 2세 시뮬레이션을 해 주었다. 부모 사진을 섞어서 아이 얼굴을 만드는 것이다. 부모보다 유전자가 업그레이드되는 게 이 어플의 상당한 장점인데, 혼자 보기 아까웠다. 이런 귀여운 아가들을 확 낳아 버릴까 싶은 마음이 가끔 들기도 한다.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나는 아이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장미를 좋아한다고 해서 꼭 장미 정원을 가꾸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듯, 출산과 육아에 큰 부담을 느껴 엄마가 되는 길의 80프로 정도는 내려놓고 있다. 나는 분명히 장미 정원을 가꾸는 것보다는 글쓰기와 연애를 더 좋아한다. 덜 좋은 것을, 더 좋은 것을 위해 아쉽지만 포기한 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는 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장미를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더 좋아하는 것에 나를 쏟고 있다. 하지만 100프로라고 단정할 순 없을 것 같다.


최근 우연히 유튜버끼리의 싸움을 봤다. "애 절대 낳지 마라."라는 제목의 영상을 A유튜버가 올려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샀고, 그것에 대해 반박하는 B유튜버의 영상이 올라와 갈등을 빚은 것이다. 두 영상을 보면 둘 다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고, 좀 과하거나 과격하다 싶은 부분이 있다. 보기 안타까웠다. 자기가 가는 길이 좋은 길임을 선전하고 싶은 이기심이 과해지면, 남들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오만함이 커져서 남의 길을 깎아내리게 되기도 하나 보다. 각박한 삶을 견디기 위해 마음의 여유를 다 팔아야 했을 때, 나 또한 그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자기가 선택한 길과 그것을 선택한 마음을 잘 들여다 보고 그것이 자기에게 맞는 길이라는 믿음이 크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얻는 행복이 진심이라면, 굳이 자기 선택을 남에게 설득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면 당연히 남의 선택을 깎아내릴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남을 깎아내리는 마음은 결국 내가 취할 수 있는 좋은 것들을 잃게 하고, 다른 길을 가지만 친구가 될 수도 있는 사람들까지 잃게 한다. 같은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해서, 친구가 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따뜻하게 서로를 바라봐 줄, 마음이 비슷한 친구가 많다면 삶에서 더 좋은 것들을 많이 가질 수 있다. 나는 브런치에서 그런 것을 많이 느끼고 있다.



아이는 낳지 않고 있지만

낳고자 하는 본능은 한없이 집요해서

나는 오늘도 글쓰기를 멈추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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