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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Mar 03. 2021

시작됐나, 봄


https://youtu.be/Z5gMPz6YeKc





베란다에 내어 놓은 올리브 화분에 오랜만에 햇살이 닿는다. 자세히 보고 싶어서 베란다 문을 열었는데도, 공기가 차갑지 않다. 봄이 왔다 보다. 봄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몸. 그것과는 반대로 봄이 거듭해서 올 때마다 내 머릿속에선 봄을 닮은 여자애들이 한 명 씩 튀어나온다. 그 여자애들로 인해 이상하게도 나는 여자애였을 때보다 더 애틋한 마음으로 봄을 맞게 된다. 작년보다 봄이 더 좋다. 짝사랑을 하는 기분이다.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봄은 더 멀어지고,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나는 봄이 더 좋아지고.



나보다 봄이 나를 더 좋아했던 날. 그걸 모르는 나를, 봄은 더 좋아했겠지.


학교 밖에서 점심을 먹고 과동기 몇몇과 참새처럼 떠들며 학교로 올라가던 중이었다. 반팔 위에 입은 청자켓이 답답한 느낌이 살짝 들었지만 벗어버리기엔 추운, 포근한 날씨였다. '소설론'이나 '서사교육론' 같은 수업은 맨 앞에 앉아서 교수님 입에서 흘러나오는 조사 하나도 놓치지 않고 머리에 다 꽂아 버리겠다는 마음으로 재미있게 들었다. 하지만 '매체언어교육론'이나 '고전문학강독' 같은 수업 땐 맨 뒤에 앉아서 고등학교 때부터 내공이 탄탄한 유체이탈 신공을 펼치며  무용한 상상 속에 부유하곤 했다. 오후 수업의 시작은 '고전문학강독'이었다. 유체이탈로 만족하기엔 가슴을 파고드는 봄날이 너무 아까웠다.


"우리 고전문학 째고 사직동에 자전거 타러 갈래?"

"......"


싸한 분위기. 그날 나와 점심을 함께한 동기들은 이후 장학금을 받고, 조기 졸업을 하게 된다. 나만 빼고. 착하고 매너 있는 모범생들이었다. 애들은 자기네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으며 수줍게 웃었다. 어쨌든 책은 사물함에 넣어야 해서 수줍은 동기들을 따라 학교로 올라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봄볕을 못생긴 고전문학강독 책과 함께 하기엔 너무 아쉬워(그땐 고전문학의 참맛을 모르는 하수이긴 했다.), 나는 폴더 핸드폰을 열었다. 며칠 전 내 기습 뽀뽀로 급격히 가까워진 상현오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선땡: 오빠, 오늘 만날래?

상현오빠: 선땡이 너 지금 학교 아냐?

선땡: 학굔데, 수업 쨀 거야. 몇 시에 마쳐?

상현오빠: 역시 우리 선땡이. 말려도 쨀 거잖아? ㅋㅋ 3시에 마쳐.

선땡: 히히 그럼 마치고 사직동으로 와. 나 자전거 타고 싶어.


뽀뽀로 첫 번째 연애를 망쳐버린 나는, 이후 비약적 변신을 거듭하여 좋아하는 마음을 뽀뽀로 바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여자애가 되었다. 첫 번째 남친이었던 S선배와 상현 오빠에게 각각 나는 완전 다른 여자애로 보였을 것 같다. S선배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답답해했지만, 상현 오빠는 내 분방함에 환호했다.


"선땡이 넌 다른 여자애들이랑은 달라. 특이해. 너 쪼끄만 게 이렇게 뽀뽀하는 건 어디서 배웠냐?"


이렇게 자주 물었는데, 나는 늘 말없이 웃음으로 대답했다. 웃음은 뽀뽀로 이어지곤 했다. 키스도 많이 했지만, 살짝 닿아 폭신하던 입술의 감촉이 더 많이 떠오르는, 폭신폭신하고 귀여운 시절이었다.



그날 우리는 허벅지가 뻐근해지도록 자전거를 탔고, 노을을 보며 손을 잡고 걸었다. 갓 제대를 했고, 여자를 처음 사귀어보는 상현 오빠와 그보다 두 살 어리고 이제 막 세 번째 연애를 시작하는 나는 발이 잘 맞는 짝이었다. 짝짓기에 급급한 암수라기보다, 놀고 싶어 얽혀 뒹구는 친한 강아지들처럼 우리는 자주 손을 잡고 걷고, 안고, 입을 맞췄다.


상현오빠와 사귀면서부터 나는 내가 비로소 예쁜 '여'대생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에 대한 낯가림이 사라진 것이다. 쭈뼛거리던 작은 여자애는 사라졌다. 문을 활짝 열고 분방한 나를 다 꺼내서 보여 주고 마음껏 사랑을 표현해도 사랑받을 수 있음을 깨달았던 스물둘의 나.


그때 나는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에쿠니 가오리 소설의 '아오이', 은희경 소설의 '강진희',  밀란쿤데라 소설의 '사비나' 같은 여자들을 마음껏 훔쳐보며, 매력적인 여자들이 어떤 식으로 사랑을 즐기는지 탐구했다. 그때부터 나의 연인들은 나를 좋아하는 동시에 재미있어했다. 얼핏 얌전해 보이는 얼굴 뒤에 숨은 엉뚱한 생각들을 사랑해 주었다.



생각해 보면, '고전문학강독' 같은 건 한 번 더 째버려도 상관없었다. 이제 그걸로 밥벌이를 하는 나는 책을 안 보고도 '관동별곡'을 줄줄 외며  풀이할 수 있다. (물론 열공하던 나의 동기들은 나보다 더 잘 살고 있다.) 나는 결국 '왜 그때 더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지?' 보다 '왜 그때 더 열심히 놀지 않았지?'를 더 아쉬워하는 불건전한 어른이 되었다. 그날 상현 오빠와 탔던 자전거. 페달을 밟던 짐 없이 경쾌하던 마음. 같이 손잡고 걸으며 봤던 빨간 노을. 그보다 더 빨개지던 우리. 통통한 볼에 닿던 입술. 내 엉뚱한 소리에 폭소하던 하얗고 귀여워 소년 같던 청년. 이런 것들은 두고두고 내 가슴에 남아 다가오는 봄처럼 내 가슴을 부풀린다. 시간이 많이 흘러 마음은 묽어졌지만 그것이 주는 자극은 더 진해져, 웃음이 되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여전히 나를 즐겁게 하고 있는 것이다.


늘 이렇게 웃게 하는 기억만을 주었다고 할 순 없지만, 내 심연의 호소에 응했던 마음은 이런 식으로 종종 내게 보답을 해 온다. 그러다 보니, '불건전함'은 내 캐릭터의 중심으로 포섭되었다. 나는 오늘 먹고 싶은 먹이를 오늘 먹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야생성을 동경하는 여자가 되었다.


편의점의 점주는 복잡한 캐릭터였다. (중략) 손님이 없을 때면 알바생들에게 자기 옛날 얘기를 하곤 했는데, 그중에서 한때 그가 필리핀 마닐라에서 작은 무역회사를 운영하던 시절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필리핀 바닷가에 가면 어부들이 해먹에서 낮잠을 자고 있어. 왜 하루 종일 낮잠만 자냐고 물어보면 어부가 되물어. 그럼 잠 안 자고 뭘 합니까? 이 사람들아, 나가서 물고기도 잡고 돈도 벌고 그래야지. 그럼 어부가 또 물어. 고기 잡고 돈 벌어서요? 좋은 집도 짓고 애들도 교육시키고 그리고 편안히 쉬어야지. 그럼 어부가 웃으면서 뭐라는지 알아? 지금 쉬고 있잖아요. 그렇게 말하니까 할 말 없더라고. 참 팔자 편한 놈들이야. 가난하게 사는 덴 다 이유가 있어. 안 그래?"

글쎄. 그렇지만 나는, 하루 종일 굴신도 제대로 못 하는 좁은 매장에서 재고관리에, 손님 상대에, 물품 주문에, 그리고 장부정리까지. 온갖 격무에 시달리는 서울의 편의점 점주와 느긋하게 낮잠을 자다가 잠깐 고기를 잡는 필리핀 어부 중, 누구의 인생이 더 나은 것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김영하, '퀴즈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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