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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Mar 05. 2021

빈약한 상상력이 세상에 남기는 상처

성공하고 싶어서 꿈꾸는 거 아닌데요?




학원에서 일할 때 동료 강사 P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P선생은 남편이 알 만한 대기업에 다니고, 아들도 알 만한 명문 자사고를 다니며, 내외가 허리가 휠 정도로 사교육비를 쓰는 걸 학원에 근무하는 수십 명의 강사들이 다 알 정도로 오지랖이 오지는 사람이었다. 


"우리 선미쌤은 공부를 좀 더 해서 임용을 계속 해보지 그랬어. 야무지고 참해서 학교 선생만 되면 '사'자 남편도 잘 하면 꼬실 수 있겠는데. 우리 아저씨 아는 괜찮은 총각들도 많은데, 임용 포기한 게 너무 아까워. 더 늙기 전에 공부 해. 지금이야 이쁘지, 늙으면 아무 데도 안 팔린다?!"


자기 딴에는 칭찬을 포함한 진심어린 충고를 해 주는 것 같았다. 사람 생각이 다 다르고 그건 지 생각이니 크게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사'자도 아니고 대기업도 아닌 남자친구와 열애 중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남편의 후배를 소개해 준다며 친한 척을 해 대는 P선생을 좋아하기는 힘들었다. 다만 소설을 쓸 때 참고하면 좋을 캐릭터라 눈여겨 보긴 했다. 뭐 진심어린 충고도 해 주고 칭찬도 해 주고 캐릭터도 제공해 주니 나로써는 괜찮은 동료라 할 만했다.



왠지 모르게 P선생을 떠오르게 하는 이야기를 며칠 전 제혁이에게 들었다. 제혁이는 내가 가르치는 애들 중 성적은 제일 별로지만, 상상력이 남달라서 내가 조카처럼 귀여워하는 아이다.


"쌤, 저 수학 학원 끊었어요."

"왜?"

"원장쌤이 너무 마음에 안들어서요."

"(웃으면서) 원장쌤이라고 네가 이쁘겠어? 왜 뭐가 맘에 안 드는데?"

"제가 한 번 숙제를 안 해간 적이 있어서 남아서 상담을 했거든요? 근데 저한테 뭐라는지 알아요?

"뭐랬는데?"

"그 쌤이 제가 유튜버 하고 싶어하는 거 알거든요. (이 대목에서 이 녀석이 약간 울먹거리며 눈에 눈물이 그렁했다.) 근데 "너 같이 불성실하고 성적도 안 좋은 놈이 유튜버로 성공할 것 같냐? 니가 유튜버로 성공하면 내가 여기(8층)서 뛰어내릴 거다." 이러는 거예요. 진짜 극혐이지 않아요?"

"헐. 진짜? 진짜 그렇게 말했어? 진짜 그렇게 똑같이 말했다면 선생님이 너무 하셨네."

"그쵸? 그래서 엄마한테 말하고 그냥 관뒀어요."

"잘 했어. 울지 말고 그런 말에 신경 쓰지마. 그 선생님이 모르고 하는 소리야."


원장선생이 들으면 충고를 못해 아쉬워하겠지만 제혁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유튜버로 성공하기도 어렵고, 잘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하지만 방송 만드는 걸 좋아해서 잘 되지 않아도 하고 싶고, 정 어렵다면 다른 일을 하면서라도 꼭 해 보고 싶어 한다. 성공하면 좋겠지만 꼭 성공하려고 그런 꿈을 꾸는 건 아닌 것이다. 돈을 많이 벌거나 유명해지지 못한다 해도 그걸 하는 자체가 좋아서 하고 싶은 마음을, 그 선생님은 잘 이해하지 못 하시는 것 같았다. (아니면 학부모들의 성적푸쉬에 대한 과잉충성 같은 걸 수도 있다. 그런 식의 인신공격적 훈계를 장려하는 학부모들이 상당 수 있다는 걸 알고 나는 요즘도 종종 놀란다.)



꿈을 꾸는 마음, 어떤 일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두 가지가 있다. '그 일이 좋아서 꼭 잘 되지 않아도 하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어서 하고픈 마음'과, '그 일이 반드시 잘 되어 세속적인 성취를 이루는 좋은 도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전자에게 그 일은 그 자체로 목적이고, 후자에게 그 일은 수단이다. 수단으로서의 꿈만을 꿔 온 사람은 목적으로서의 꿈을 꾸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모르나 보다. 그저 현실감각 떨어지는 허파에 바람든 놈으로 여길 뿐.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다.


사람도 두 가지 눈을 가지게 되어 있다. 보이는 것만을 보는 눈과 그 이면의 영혼을 보는 눈. 후자가 결여된 삶은 아무래도 조금은 부박하게 흐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P선생이나, 제혁이 원장 선생처럼 상상력이 유독 부족한 사람들. 그 사람들은 눈에 잘 보이는 것, 당장 수치화할 수 있는 것들로 편리하게 타인을 재단한다. 그리고 손쉽게 서열을 매기고, 그 서열이 자기보다 위면 비굴하게 비비고 자기보다 아래이면 충고라는 포장을 씌워 상처를 준다. 껍데기 안에 든 영혼이 안 보이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에는 각자 그럴만한 사연과 역사가 있었을 것이므로 그런 사람들을 섣불리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비난보다는 연민이 앞선다. (물론 그들은 대부분 나같은 사람을 불쌍히 여길테지만.) 그런 사람들은 삶에서 즐길 수 있는 것들과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놓치고 살아간다. 드러난 앞 면만 보고 더 멋진 이면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자기들이 선택한 삶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방식이니 내가 그들의 인생에 대해 가타부타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종종 순수한 영혼들을 할퀸다. 그런 사람들의 욕심이 꿈꾸는 상상력에 상처를 주는 것이다.


사교육 바닥에 있다보면, 그런 장면을 자주 목격한다. 좋은 성적을 위해, 좋은 대학을 위해 아이들은 수도 없이 인신공격을 당한다. 더 불행한 경우, 그런 게 세상의 전부라 여기고 그런 세상에 젖어들어 그런 어른으로 커 간다.  그런 곳에서 한 목소리 내지 못하고 방관자가 되어 버리는 내 현실을 인식할 때, 나는 이곳에서 발을 빼고 싶은 충동을 많이 느낀다. 동조하고 싶지 않은 주장에 한 표 던지고 있는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이 든다.


P선생은 지금 어디선가 '사'자 남편이 된 아들의 참한 신붓감을 물색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제혁이는 며칠만에 그 사건을 까맣게 잊고 해맑게 웃으며 자기가 찍은 영상을 카톡으로 보내 주었다.  


"그래도 너 수학 숙제는 잘 해야 나중에 학교 잘 가고 유튜버 더 편하게 할 수 있다!!"


라고 말해 주며, 나는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음악 맛집 Francis 작가님이 어울리는 노래를 추천해 주셔서 같이 듣고 싶어 링크 걸어요. 고마워요. :)

https://youtu.be/rxW2lyirf1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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