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페르소나'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이 글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페르소나' 중 '썩지 않게 아주 오래'를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입니다.(요약이나 단순 리뷰가 아닙니다.) 감독의 의도나 일반적 해석과 관계없이 영화를 보며 경험했던 저의 감정을 이야기로 풀어 적은 것입니다.
여자와 남자가 마주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다. 장난기 어린 눈으로 자주 웃는 단발머리 여자는 말이 많다.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와중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가 앞으로 다시 빼기를 반복한다. 목까지 잠근 하얀 셔츠가 단정한 남자의 몸은 마치 여자가 당기고 있는 것처럼 여자 쪽으로 기울어 있다. 남자는 눈을 반짝이고 때론 소리 내어 웃으며 여자의 이야기에 빠져 있다.
남자는 여자를 아직 잘 모른다. 여자가 요즘 '태연한 인생'이라는 소설을 읽고 있고, '에피톤 프로젝트' 노래에 빠져 있다는 것. 지금 입고 있는 핫팬츠는 지난주에 '아메리칸 어패럴'에서 샀고, 오늘 밤엔 남자와 '닭발의 천국'에 가서 소주를 마시고 싶다는 것 정도를 알고 있다. 남자는 여자가 궁금하다.
여자는 단정하고 다정한 남자가 편안하고 귀엽다. 수줍음이 살짝 묻어 깨끗한 웃음과 길고 굵은 목 중간에 도드라진 목젖을 계속 보고 싶어 진다. 여자는 남자가 궁금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남자에게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즐겁다. 여자는 본격적인 연애가 시작되기 직전에 여자를 좋아하기 시작한 남자들의 눈을 보는 것이 행복하다. 그 호기심과 호감으로 너그러운 눈. 그것은 깊이 사랑하고 아끼는 눈과는 다른 모양으로 아름답다. 여자는 그 눈들을 최대한 또렷하게 기억해서 가슴속 깊은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것은 여자의 영혼이 반짝이던 순간의 증거물들이다. 사랑이 끝나도 여자는 그 눈들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래도록 여자의 가슴에 남아 그때가 언제이든 그때보다 더 젊고 아름다웠던 여자의 영혼을 증명할 것이다.
사랑이 시작되기 직전. 봉오리를 살짝만 벌린 채 얼굴을 다 보여주지 않는 꽃처럼 도도한 시간. 여자는 이 시간을 사랑하고 즐긴다. 사랑이 시작되면 오게 마련인 안정과 질서, 의리 같은 것들이 배제된, 매혹만으로 흥건한 자유로운 시간.
여자는 이 순수한 매혹의 시간을 되도록 오래 갖고 싶다. 서로의 영혼에 도착하지 못해 더 반짝이는 눈빛을 최대한 오래도록 음미하고 싶다. 그래서 본격적인 사랑의 시작을 최대한 유보시키기 위해 아주 조금씩 완급을 조절하며 자기를 내어 보인다. 사랑의 유예 기간을 조절할 수 있는 여자의 힘은 점점 커지는 사랑에 흔들려서, 이 아름다운 시간은 늘 여자가 원하는 것보다 짧다. 여자는 깊어진 사랑의 가운데에서도 자유로웠던 이 시간을 종종 그리워한다. 사랑이 끝나고 나서도 여자는 이 시간을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포장해 저장하고, 훗날 남자를 떠올릴 때 이것을 제일 먼저 꺼내어 들여다본다.
부풀어 오르는 매혹을 참지 못해 둘은 연인이 되었다. 그러고도 시간이 많이 흘러 어느덧 여자는 침대 위에서 남자의 팔을 베고 누워 있다. 취해서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둘은 사랑의 한가운데에 나란히 누워 아련해진 시작점의 순간들을 꺼내어 맛있게 나눠 먹고 있다. 여자는 "그때 그 반짝거리던 자기 눈을 뽑아서 그대로 냉장고에 넣어 두고 싶었어."라며 남자의 볼에 입을 맞춘다. 남자는 "자기 진짜 또라이 같아."라며 폭소한다. 둘은 이제 활짝 열려 더 사랑스러운 서로를 안는다.
사랑을 시작한 남자의 눈을 뽑아서 냉장고에 넣어 두고 싶어 하는 이 여자는 내 안에 있는 이상한 여자들 중 한 명이다. 근데 며칠 전 이 이상한 여자가 실제로 나오는 영화를 보고 경악했다. 감독이 내 머릿속을 훔쳐보고 간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영화는 내 감정의 어느 한 부분을 닮아 있었다. 영화 속 여자가 내 안에 있는 이상한 여자보다 훨씬 더 예쁘다는 것(사랑해요 아이유 우윳빛깔 아이유!!)과 눈알을 뽑는 게 아니고 심장을 꺼낸다는 것만 달랐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깜짝깜짝 놀라며, 내 영혼을 닮은 영화 목록에 이 영화를 집어넣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된 내용이 공개됩니다. 스토리보다 장면의 함축적 의미가 중요한 영화라 스토리를 다 알아도 충분히 즐겁게 감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원치 않으신다면 스킵해 주세요. ^^
'은'이는 비밀이 많은 여자다. 보름씩이나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나타나기도 하고, 데이트 중에 화장실을 가는 체하며 다른 남자를 만나 키스를 하기도 하는 나쁜 여자다. 이런 은이에게 푹 빠진 '정우'는 약혼녀와 파혼까지 하고 은이와 사귀고 있다. 은이는 정우와 대화하는 도중에 계속 핸드폰을 보거나 하품을 하며 영혼 없는 대답만을 한다. 그에 비해 정우는 은이가 너무 좋아 밤을 함께 보내고 싶어 한다. 지루함을 못 참고 가려는 은이를 붙잡아 앉힌 정우는 솔직하게 은이에게 따져 묻는다. 우리가 연인 사이가 맞냐고,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한다고. 은이는 사랑한다면 그 마음을 꺼내서 보여달라고 한다. 그러자(갑자기 영화가 잔혹극으로 바뀐다.) 정우는 자기 가슴에 손을 넣어 심장을 꺼내어 은이에게 건넨다. 은이는 흡족한 표정으로 심장을 받아
"썩지 않게 잘 절여서 아주 오래오래 보관할게."
라고 하며 통에 담아 가방에 넣는다. 은이의 가방 속에는 그렇게 모은 남자들의 심장이 여러 개 들어 있다.
이 영화는 런타임이 30분이 채 안 되는 짧은 작품이지만, 장면 하나하나가 상당히 상징적이고 압축적이다. 장면과 대사를 눈여겨보면, 사랑할 때 경험할 수 있는 여러 감정을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다.
"그냥 더 자유롭고 영원했으면 좋겠어."
"난 오빠랑 아무런 법적인 약속을 하지 않은 자유로운 관계예요. 누구랑 어디를 가든, 뭘 하든, 뭘 하고 싶든, 무슨 얘기를 하든 다 내 의지에 따라서 움직일 수 있는 몸이라고. 오빠, 세상엔 참 별의별 이상하고 알 수 없는 관계들이 존재해. 꼭 A 다음에 B가 아니고, 꼭 1 다음에 2가 안 와도 된단 얘기야."
"사랑이 뭔데? 참사랑을 좀 보여줘. 그 마음을 여기 앞에 꺼내서 내놔 보라구. 그건 못하지? 그치? 진짜 그렇게까지 하는 남자는 요새 한 놈도 못 봤어."
-'은'이의 대사들
사랑의 시작과 지속에 대한 남자와 여자의 다른 태도.
'공식적 연인'들에게 강요될 수밖에 없는 '속박'이나 '의무'같은 것들.
그런 것들로 인해 경직되고 전형화되어 ‘자유’라는 본질이 왜곡되는 사랑.
그런 것들의 어디까지를 사랑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
사랑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여자의 마음.
사랑을 빨리 공식화하고 안정적인 관계를 시작하고 싶어 하는 남자의 마음.
그래서 결국 어디까지가 진짜 사랑이며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하는 건지.
이 영화는 이런 것들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진다.
내 안에는 이상한 여자들이 많다. 그 여자들의 이상한 생각은 도덕이나 법, 굳어진 관습이나 선량한 문화 같은 것들과 거리가 멀다. 그 여자들이 시키는 대로 산다면, 나는 지금처럼 평화롭게 이 세상에 존재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세상과 친하지 못할, 다소 이상한 욕망이나 감정이라고 해서 그것들을 아닌 척 외면하거나 눌러 버리고 싶진 않다. 그런 자기기만은 사람을 불행하게 한다.
내 안에 이상한 여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독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소설을 읽거나(또는 직접 쓰거나) 영화를 보며 어떤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 경험으로 내 안에 사는 이상한 여자들을 꽤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다독이고 다스릴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나는 '은'이를 닮은 내 머릿속의 이상한 여자를 불러내어 실컷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 글은 그 여자가 해 준 이야기를 받아 적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