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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Mar 18. 2021

'노인'은 아름다워야 할 나의 미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빨간 머리 앤'  스토리텔링 번외 편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이 글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빨간 머리 앤'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입니다.(요약이나 단순 리뷰가 아닙니다.) 이 글을 읽고 시리즈를 감상하시면, '빨간 머리 앤'의 매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스포 X)





1. '나는 노인과 상관없다.'는 착각


사우나에서 자주 만나던 할머니가 있었다. 팔순이 넘으신 그분은 늘 젊은 여자들을 보면 알은체를 하며 말을  거시곤 했다. 몇 살이냐. 결혼은 했냐. 아이는 있냐. 몇 동에 사냐. 집은 샀냐. 이런 호구 조사로 시작된 질문은 젊어서 참 예쁘다. 나는 팔십이 넘었다. 이제 목욕하기도 힘들다. 그래도 영감 밥 차려 준다. 같은 젊음 예찬과 개인 정보 공개로 이어졌다. 내가 직접 듣기도 했고 멀리서 엿듣기도 했는데 대화의 내용은 상대와 관계없이 늘 비슷했다. 나는 친하지 않은 사람과 하는 저런 식의 선 넘는 대화를 부담스러워하는 편이다. 어쩌다가 할머니와 얼굴을 트게 돼 버린 나는 할머니의 복붙 질문공세를 피하기 위해, 할머니를 발견하면 멀찌감치 구석에 숨곤 했다.


할머니. 노인. 나와는 상관없는 이름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물론 "나도 곧 할머니야." "나도 이제 많이 늙었나 봐. 이러다가 금방 할머니가 되겠어." 같은 말을 하기도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노인이 되는 상황을 진지하게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노인은 내게서 너무 먼 것이라, 마치 내게 오지 않을 것처럼  늘 외면해 왔던 것이다. 


'빨간 머리 앤'의  마릴라와 매슈를 보며 '노인의 삶과 사랑'에 대한 내 나름의 소박한 철학이 정리되었다.




2. 마릴라의 봄


늘씬한 마릴라는 늘 긴 풀 스커트에 단정한 가죽 벨트를 하고 있다. 모델처럼 기품 있고 멋지다. 하지만 '검소'나 '실용'을 강조하는 극 중 캐릭터 덕에 늘 똑같은 머리를 하고 있다. 깔끔하게 하나로 묶은 화려하지 않은 스타일. 어느 날 초록 지붕 집에 '네이트'라는 잘생긴 청년이 하숙생으로 들어온다. 네이트는 에번리에 금이 있다고 사람들을 부추기는 사기꾼이다. 그래서 여자들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노소를 안 가리고 진심이 아닌 작업용 멘트를 자주 날리는데, 마릴라도 그의 표적이 된다. 머리를 감다가 네이트에게


"세상에, 머리 향기가 여름 산들바람처럼 상큼해요."


라는 말을 듣고 난 뒤부터 마릴라는 설레기 시작한다. 네이트의 벗은 몸을 보고 두근대는 심장을 어쩌지 못하고, 거울 앞에 오래 앉아 머리를 땋았다가 올렸다가 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 장면을 본 애인과 나의 대화는 이러했다.


애인: 저 아주머니는 주책이라고 해야 할지,, 근데 머리스타일 바꾸니까 엄청 이쁘시네!!

나: 그치? 근데 저런 걸 주책이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애...... 네이트가 마릴라랑 사귀진 않지만, 마릴라 아줌마  더 이뻐지셨잖아!!


이성에게 느끼는 설레는 감정. 자기의 여성성 또는 남성성을 의식하고 과시하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 여성으로 또는 남성으로 이성과 사랑을 나누고픈 욕망. 이런 것들이 노인이 되면 깡그리 사라질까? 물론 그런 욕망이 삶과 사랑의 전부라 할 순 없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에 향긋한 숨을 불어넣어 준다는 건 명백하지 않을까. 내가 마릴라의 나이가 된다고 해서 그런 욕망이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할머니가 되어도 나는 여자이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을 것이다. 그걸 누군가 억누르거나 눈치 준다면 저항할 게 분명하다.  하고픈 대로 하는 것이 나이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비록 마릴라의 설렘은 이불 킥으로 끝났지만, 나는 머리를 땋아 올려 화사한 여자가 된 마릴라를 늘 지지할 것이다.





3. 머슈의 사랑


머슈는 앤을 만난 첫날부터 '앤 바보'가 된다. 친딸처럼 앤을 아끼며 자기도 더 행복해진다.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머슈이지만 그에게도 '지니'라는 정인이 있었다. 형의 죽음으로 힘든 시기에 지니를 만나게 되어 그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지니는 머슈의 가슴 한 켠에 잔잔하고 아련한 사랑으로 남아있다. 앤의 옷을 사러 갔다가 지니와 재회한 머슈. 앤은 둘 사이의 기류를 눈치채고 머슈의 사랑을 돕기 위해 편지까지 몰래 대신 써서 지니에게 보낸다. 하지만 머슈는 그런 앤을 저지하고, 지니에게도 자신은 남은 생을 앤을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라 말한다.


이 장면을 본 애인과 나의 대화는 이러했다.


나: 아니, 그 사랑(앤에 대한 사랑)이랑 이 사랑(지니와의 사랑)은 다른 거 아냐? 앤도 사랑하고 지니도 사랑하면 되지. 한쪽을 많이 사랑한다고 다른 한쪽 사랑이 줄어드는 게 아니잖아!

애인: 그러게? 지니 아줌마랑 사귀면 앤만 사랑할 때보다 더 행복해질 텐데. 사귀지......



앤에 대한 머슈의 따뜻한 사랑과 그것으로 인한 앤의 아름다운 성장. 이런 주제를 전달해야 해서 저렇게 이야기가 흘러가는 게 부자연스럽진 않았지만, 나는 많이 아쉬웠다. 이성과 사랑을 나누는 것과 혈육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영역의 일이다. 양쪽 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신은 인간에게 주셨다 믿는다. 이 세상의 수많은 마릴라와 매슈가 짝을 놓치지 않고 더 즐겁게 살기를 바랐다.




4. 우리 엄마


우리 엄마는 혼자가 된 지 오래되었지만, 연애를 안 하신다.(나 몰래 사귀고 있는 게 아니라면ㅋㅋ) 가끔 우리 모녀 사이엔 이런 대화가 오간다.


나: 어디 착하고 괜찮은 할배 없나? 엄마도 연애를 해야 되는데.

엄마: 아이고 됐다 마. 이 나이에 말라고.(이 나이에 뭐하려고.) 혼자가 편하다.


가끔 모임에 나간다고 이 옷 저 옷 입어 보며 뭐가 예쁘고 날씬해 보이냐고 나한테 물어보거나, 예쁘게 차려 입고 화사하게 웃는 우리 엄마를 볼 때면 아무래도 '사랑'을 안 하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han 작가님'의 브런치에서 그분의 버킷리스트를 본 적이 있다. 그중 '나이 들고 나서도 이쁘게 근육 만들고, 해변에서 여인과 와인 마시기'가 있었다. 자식들은 성인이 되었으니, 손주 키우기 같은 것은 당연히 마다하고 본인의 삶을 즐기고 싶다고 하셨다. 얼마나 멋지고 현명한 계획인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가족이나 직업 같은 소속과 별개로 자기 삶을 즐기고 싶은 욕망은 변함없을 것이다.




5. 자, 이제 슬며시 태세 전환


나는 내년에 마흔이 된다. 작년부터 가끔 흰머리를 목격한다. 주름도 하나둘씩 자리를 잡고, 똥배도 점점 묵직해져 간다. 에너지도 의욕도 예전 같지 않다. 가장 예쁘게 반짝이는 시기는 이제 지나갔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여자로 아름답고 싶고, 여자로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 백발에 주름 가득한 얼굴이 된다 해도 그 욕망은 다소 힘이 약해질 뿐 변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며칠 전 엘리베이터에서 오랜만에 사우나 할머니를 만났다. 활짝 웃으시며 얼굴을 가까이 대고 어찌나 반갑게 알은척을 하시는지. 그리고 예의 그 관심 어린, 애정 어린 눈으로 나를 오랫동안 쳐다보셨다. 처음으로 할머니 눈빛을 자세히 봤는데, 그 눈빛엔 내가 있었다. 내가 꼬마들이나 어린애들을 볼 때의 그 눈빛. 예뻐하고, 귀여워하고, 사랑스러워하는 눈빛. 왜 나는 어린아이들에게는 그렇게나 관대하면서 노인에게는 그토록 인색했을까. 내가 한 때 가졌던 것에 대한 그리움과 찬사가, 내게 곧 올 것이지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한 회피와 외면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할머니의 복붙 질문 공세는 사실, 내가 꼬마들에게 하는 것과 같았다.

"몇 살이야? 몇 동 살아? 이 예쁜 머리는 누가 해줬어? 아이고 예뻐."와 같은.


나는 어느 때보다도 정답게 할머니께 인사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나는 하루하루 노인에 가까워지고 있다.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흐를 것이다.


나는 예쁜 할머니로, 행복하게 늙을 것이다.

일레븐 언니 말처럼

주름이 자글자글한 입술에 장밋빛 립스틱을 바르는 할매가 될 거다. 꺄악!!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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