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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Mar 29. 2021

이거 누구 목줄이야? 1





1.


승우와 나는 사랑을 나눈 후 씻지 않고 알몸을 맞댄 채 이렇게 누워 있기를 좋아한다. 나는 그의 팔을 베고 옆으로 누워 강아지처럼 킁킁거리며 그의 냄새를 맡는다. 그의 몸에서는 남자 몸에서 나는 특유의 기름진 냄새가 난다. 약간의 땀 냄새도. 그의 손이 내 머리에 닿는다. 손가락을 빗처럼 벌려 스윽 스윽 내 머리카락을 쓸어 준다. 승우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감싸는 느낌이 좋다. 우리는 친한 강아지들처럼 말 없이 손으로, 눈으로, 입술로 사랑을 말한다. 언젠가 우리가 헤어진다고 해도, 나는 해가 잘 드는 그의 방 침대에서 알몸으로 누워 오늘처럼 상쾌했던 날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늘 온몸을 열어서 음미한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 두듯 또렷하게 기억하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말은 몽롱한 기분을 현실로 돌아오게 할 뿐이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을 땐 눈을 본다. 서로가 같은 말을 하고 싶어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얼마나 잤을까. 멀리서 들리는 커피 머신 소리에 실눈을 뜨고 옆을 보니 그가 없다. 그새 해가 졌는지 방은 어둡고, 열린 방문 틈으로 주황색 빛이 새어 들어 온다. 이디오피아 예가체프의 시큼한 산미향이 같이 들어 온다. 아침에 내가 집에서 가져온 커피. 나는 넓은 우리 집보다 좁은 그의 집이 더 편하다. 감당하기 버거운 수준으로 내 삶의 반경을 넓힌 것이 내가 불행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승우의 냄새가 묻은 이불을 덮고 온몸에 힘이 빠지도록 낮잠을 자다 깨서 지금처럼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커피향을 맡을 때. 나는 내가 그렇게 심각한 거짓말쟁이는 아니구나 싶어 안도한다. 유치원복도 못 벗고 칭얼대다 잠이 들었다 깨어 주방에서 찌개를 끓이는 엄마 소리를 확인하고 다시 눈을 감던 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안심이 된다.



"나도 커피 한 잔만."

"깼어? 최대한 소리 안 내려고 했는데?"

"소리 나서 깬 거 아냐. 깨고 나니까 소리도 나고, 커피 냄새도 났어."

"그래? 이 커피 향 무지 좋은데?"

"넌 그렇게 안 생겨서 어떻게 그렇게 커피 종류를 몰라? 예가체프는 요즘 고등학생들도 알아."

"이름이 무슨 상관이야. 향이 이렇게 좋은데."



승우는 쌍꺼풀 없는 눈가에 자연스런 주름을 만들며 웃는다. 예쁘다. 내가 잘 때 머리를 감았는지 덜 마른 머리에서 시원한 샴푸향이 난다. 승우는 큰 어깨의 윤곽이 또렷하게 드러나는 하얀 색 반팔티에 무릎이 약간 나온 회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있다. 승우의 얼굴에는 나이 든 남자가 없다. 단순히 어려 보인다기 보단, 그의 얼굴에는 짊어질 것이나 책임질 것이 없는 남자 특유의 가벼움이 묻어 있다. 가장이 되거나 아빠가 되는 그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다. 자질구레한 생활의 찌꺼기가 안 보이는 승우 특유의 말쑥함. 나는 그것 때문에 그를 좋아하는 걸까. 나는 어떨까. 승우도 나와 같은 이유로 나를 좋아하는 걸까. '우리가 만약에 부부라면'이라고 말을 꺼내 볼까 하다 관둔다. 나는 그냥 지금이 좋다. 무거운 생활이 빠진, 그래서 우리의 관계가 진짜일까 하는 번민에 빠지기도 하지만, 진짜가 아니면 어떤가. 나는 이럴 때 그냥 순돌이와 순심이를 생각한다. 강아지들은 진심 따위는 의식조차 하지 않고 좋아 킁킁대고 뒹군다. 나는 강아지처럼 킁킁대며 그의 어깨에 기댄다. 그의 티셔츠에서는 엷은 섬유유연제 냄새만 난다.



"난 네가 향수 같은 거 안 뿌리는 남자라서 좋아. 옷도 별로 없고, 시계도 안 차고, 운동화만 신고. 난 그런 남자가 좋아. 말끔한 수트에 롤렉스 차고 느끼한 향수 냄새 풍기는 놈들. 질색이야."

"나도 네가 지금처럼 얼굴에 아무 것도 안바르고 반지도 목걸이도 안 끼고 있을 때가 젤 좋아."

"어? 그럼 나 첨에 봤을 때 안 이뻤어?"

"이뻤지. 근데 지금이 더 좋아. 이게 진짜 너 같아."

"풉. 처음부터 이 얼굴만 봤다면, 너 나 안 좋아 했을 걸?! “



드르르르르륵.

분위기를 깨는 핸드폰 소리. 오늘 저녁은 집에 가서 먹어야겠군. 오전부터 시작된 우리의 집데이트는 늘 이렇게 내 핸드폰 소리로 끝나곤 했다. 숙련된 여행자가 짐을 챙겨 호텔방을 나서듯, 나는 익숙한 표정과 동작으로 씻고 화장품을 바르고 옷을 입고 그의 집을 나선다. 이제 봄이라고 얇은 자켓만 하나 걸쳤더니, 밤 공기가 차서 몸이 살짝 떨린다. 비가 좀 왔었는지 차창에 물기가 있다.


"여보, 어디야? 저녁 먹었어?"

"나 민정이네 왔다가 이제 나왔어. 저녁 같이 먹어."


알람 같은 남편의 카톡에  알람 해지 같은 답을 보내고, 내일이 월요일이라 마음이 무거운 회사원처럼 겨우 시동을 걸고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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