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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Mar 30. 2021

불운이 내게 준 것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콜(The Call)’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이 글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콜(The Call)'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입니다.(요약이나 단순 리뷰가 아닙니다.) 이 글을 읽고 시리즈를 감상하시면, 영화의 매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스포 X)






1. 우리의 삶을 닮은 어두운 이야기


나는 어두운 이야기를 좋아한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부유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가정을 버리고 치명적인 사랑에 빠져 삶을 망가뜨리고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지는 이야기. 인기 많은 남자가 못생긴 여자의 영혼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역시나 세상의 조롱과 방해로 헤어지게 되는 이야기. 연쇄살인마가 또 다른 연쇄살인마에게 애지중지 키운 딸을 빼앗기고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이야기.


멀쩡하게 잘 살던 사람이 치명적인 결함이나 불운으로 인생을 망치고 무력하게 죽어가는 이야기들.


나는 그런 이야기에 늘 솔깃했다. 그것에서 내 삶을 보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러하듯 나는 크고 작은 결함들을 가지고 있고, 살면서 종종 크고 작은 불운을 만났다. 그런 불운 앞에 나는 때때로 무력해서,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만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 삶의 일부나 전부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어두운 이야기가 내가 가진 결함과 불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나는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나에게, 내 속에 웅크린 어둠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여유를 가르쳐 주었다.





2. 어둡디 어두운 이야기,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콜(The Call)'


흥행하지 않은 한국 스릴러(는 유치하고 재미없을 거라는 편견이 있다.) 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연기를 참 잘할 것 같은 배우 '전종서'에 끌려 보게 된 영화, '콜(The Call)'.(전종서의 연기는 기대 이상이었다.)



'서연'의 삶은 어둠으로 가득하다. 먼지가 소복한 고가구들로 가득한 낡은 저택. 시한부를 앓는 엄마. 어릴 때 불이 나 죽은 아빠. 그녀의 몸에 남은 화상과 얼굴에 남은 그늘.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전화가 한 통 걸려 온다. 전화 속의 여자 '영숙'은 엄마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며 격앙된 목소리로 서연에게 도움을 청한다. 알고 보니 둘은 같은 집에 살고 있다. 하지만 영숙은 20년 전의 시간에 살고 있어 서연과 전화로밖에 만날 수 없다. 그녀들은 서로 미래와 과거의 정보를 주고받으며 조금씩 삶을 바꾸기 시작한다. 영숙은 죽을 위기를 피하고, 서연은 새 삶을 얻는다. 둘은 매일 통화를 하며 수다를 떠는 친구가 되고 서연은 자기가 사는 현재의 영숙이 궁금해진다. 영숙의 충격적인 현재(영숙의 시간에서는 미래)를 알게 된 서연과 영숙. 원하는 결말이 다르기 때문에 그녀들은 더 이상 서로의 친구가 될 수 없다.



영숙의 정체는 뭘까?

영숙과 서연은 결국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까?


아무것도 모른 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영화의 전개를 따라가는 것이 정말 짜릿했기 때문에, 독자님들께 뒷 이야기는 절대 해 주고 싶지 않다. 스포 1도 당하지 말고, 비 오는 날 밤 불 끄고 맥주 한 잔 하며 각자 즐기시길 바란다. ^^





3. 내 삶에 우연히 찾아온 불운


영화 속 두 여자는 아주 작은 우연들의 연쇄 작용 때문에 전혀 예상치 못한 미래를 맞이하게 된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내 삶의 경로를 자꾸만 바꿨던 '우연'을 끄집어내어 들여다보게 했다.


소설의 특성에 대해 말할 때 '허구성'이나 '진실성'에 이어 꼭 나오는 말이 있다. 바로 '개연성'이다. 그것은 허구의 이야기가 삶을 진실하게 그리기 위해 꼭 필요한 장치이다. 그래서 작가들은 소설을 쓸 때 최대한  '그럴듯하고 우연적이지 않게' 사건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하지만 진실한 주제를 향해 정연하게 쓰인 소설과 다르게 우리의 삶은 전혀 개연적이지 않다. 삶을 놓아 버리고 싶게 만드는 치명적인 불운과 우쭐해져 어깨가 한껏 올라가게 하는 대단한 행운. "족구 하라 그래!"(재밌어서 꼭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ㅋㅋ)라는 찰진 욕 한마디로 넘어갈 수 있는 사소한 불운과 입꼬리만 살짝 올라가게 하는  소소한 행운. 이런 크고 작은 행불운의 연쇄로 우리의 삶은 우연하게 만들어진다.


내가 서너 살 꼬마일 때부터 IMF 전까지 아빠는 물탱크와 정화조를 만드는 작은 공장을 운영해서 우리 가족을 먹여 살렸다. 90년 대 초까지의 호경기 덕이었는지 아빠의 사업은 탄탄하게 커 갔다. 엄마에게는 좋은 남편이 아니었던 것과 별개로 우리 자매에게 아빠는 꽤 다감했다. 출장지에서 돌아올 때 인형을 사다 주고, 주말에는 오므라이스 같은 요리를 해 주기도 했다. 거실 바닥에 누워 양 팔에 나와 동생을 끌어안고 나중에 우리 딸들이 결혼하면 아래층에 한 집 씩 살게 해서 사위 놈들을 꼼짝 못 하게 감시할 거라며 껄껄껄 웃던 기억이 난다.


97년, 공장이 부도가 나고  남은 재산을 가지고 아빠가 벌였던 갖가지 사업들은 다 망했다. 이전에 했던 성공은 호경기와 운 때문이란 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때부터 엄마가 장사를 해서 우리를 먹여 살렸다. 아빠가 사업할 때만큼 넉넉진 않았지만, 나는 이십 대 후반이 될 때까지 그럭저럭 엄마에게 기대어 큰 부족함 없이 살았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전업 주부이던 앳된 엄마가 생활력 강한 중년 부인이 되고 우리 자매가 어엿한 성인으로 크는 동안, 아빠는 망가져만 갔다. 우리를 양 팔에 끌어안고 껄껄 웃던 아빠는 없었던 사람처럼 아득해졌다. 우리를 버리고 바닥까지 망가진 아빠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을 때, 우리도 그동안 살던 집과 아빠를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떠나왔다.


아무것도 없이 모든 걸 새로 마련해야 하는 궁색한 상황에 우리 세 모녀는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일을 구하고 셋방을 전전하고 싸구려 세간살이를 마련하고. 그러면서 겨우 생활을 꾸려가는 동안 재산은 조금도 생기지 않고 빚이 생겼다가 약간 사라졌다가 다시 생겼다가 하기를 반복했다.


누군가는 혼자 인생을 꾸려갈 준비가 다 되었을 법도 한 나이 스물일곱. 그때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만난 '가난'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랐다. 매달 나가는 돈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선택했던 반지하방. 늦은 오후가 될 때까지도 해가 들지 않고, 화장실 불을 켜면 바퀴벌레가 지나가던 그 방. 제대로 붙지 않은 천장 도배지가 쩌억쩌억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내 인생도 그동안의 안락함에서 쩌억쩌억 떨어져서 끝이 보이지 않는 저 밑바닥으로 계속 계속 떨어질 것만 같은 우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나는 이런 질문에 시달렸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4. 우연한 불운을 통해 내가 배운 것, ‘관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작고 우연한 불운들이 모여서 그런 상황에 처했을 뿐. 우연으로 인한 삶의 급격한 변화를 온몸으로 통과해야 했던 나.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던 나를 지나치게 가혹하게 다룬 것이 미안했는지,


우연한 불운은 내게 '관조'를 가르쳐 주었다.


'관조'의 과정은 대략 이러했다.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구질구질한 상황에서 '나'만 정확하게 오려냈다. 내가 아무리 맨발로 돌밭을 걷고 있어도, 발에서 피가 나고 발톱이 빠져도 '나'의 존재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그 전과 똑같은 나였다. 내가 아는 '나'는 아름다운 것을 놓치지 않고, 나와 비슷한 사람을 찾아 사랑하고, 소중한 것을 끝까지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구석마다 검은 곰팡이가 피어 있는 그 어두운 방에서도 '나'는 그대로였다. 나는 그런 나를 탓하지 않았다. 아무 잘못이 없는 나를 절대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관조의 범위는 더 커져서, 반대의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었다. 작은 행운이 나를 간지럽히거나, 큰 행운이 나를 추켜 세울 때도 나는 그 상황에서 '나'만 오려낼 수 있었다.


구름 속인 것처럼 행복한 순간도 나의 재주가 아니며 죽음을 생각할 만큼 불행한 순간도 나의 과오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부풀어 터질 것 같은 기쁨이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나와 내 삶을 지긋이 관찰할 수 있었다. 자만과 자책을 본래보다 작게 압축시켜, 조금은 가볍게 그런 시간들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이후 나는 타인 또한 그런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 사람이 운이나 불운으로 가지게 된 배경에서 그 사람을 오려내고, 정확히 '그 사람 자체'만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친구와 사랑을 찾는다. 가끔 너무 사람만 보지 말고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조건도 좀 보라는 주위 사람들의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나는 내 방식이 평범한 생을 따뜻하게 꾸며 주는 아름다운 것이라 믿는다.



나는 이제 삶의 행불행과 성패 같은 것에서 한 발짝 물러나, 내가 보고 싶은 것에 집중하며 진실한 삶 속에 평화로이 거닐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퇴락이나 체념이 아닌 성숙이라 나는 믿는다. 내 삶의 객관적인 흐름과 무관하게 이전보다 분명히 내가 행복해졌기 때문에.


나는 내가 쓰는 글이 누구에게 '교훈' 같은 것을 줄 것이라 감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다만 자기 삶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불운'도 무언가를 주고 간다는 것을 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연한 불운에 상하지 않고

자기를 소중히 지켜

내 곁에 아름답게 머물러 주기를,


우리를 겸손하게 하는 불운보다는

우리를 우쭐하게 하는 행운이

우리에게 조금 더 많이 오기를


나는 늘 간절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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