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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Apr 09. 2021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이야기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먼 훗날 우리'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이 글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먼 훗날 우리'를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입니다.(요약이나 단순 리뷰가 아닙니다.) 이 글을 읽고 영화를 감상하시면, 영화의 매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스포 X)






https://youtu.be/GcamCbbScC8

***노래를 꼭 켜고 읽어주세요! ^^



예쁘게 보이고 싶어 늘 예쁘게 꾸미고 다녔다. 어딜 가든 정성 들여 화장을 하고, 오래 걸어야 하는데도 하이힐을 자주 신었다. 반드시 대단한 무언가가 되고 말겠다는 결기로 가득했다. 사소한 것 하나도 멋지게 잘 해내고 싶었다. 남들이 하는 건 다 해보고 싶었고, 남들이 안 하는 나만의 것도 챙기고 싶었다. 손에 쥐고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곧 쥘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로 가득한 젊음이 터질 듯이 부풀어 늘 마음이 둥둥 떠다녔다. 관조를 모르는 치기는 진지했고, 현실을 모르는 사랑은 대담했다. 그때 나는 스물일곱이었다.


그렇게나 가난하면서도 그렇게나 욕심이 많던 때. 나는 늘 그랬듯, 현실과 이상의 닿을 수 없는 간극을 사랑으로 채우고 있었다.


그때 내 퇴근 시간은 10시쯤이었다. 나는 종종 해운대(집)까지 가지 않고 수영이나 망미동에 내려 그를 만났다. 우리는 '빨간 삼겹', '멕시칸 치킨'(아 올드하다!ㅋㅋ), '문현 곱창' 같은 데서 야식과 함께 소주를 마셨다. 1차로 시작된 음주 데이트는 종종 오꼬노미야끼를 파는 이자까야나 감자튀김이 맛있는 펍으로 장소를 옮기며 2차 3차로 이어졌다. 대체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았는지 주로 화자는 나였고, 청자는 그였다. 그때  내 이야기를 가장 재미있게 들어주는 남자를 만나 나는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일기를 쓰고 소설을 쓰듯, 나는 나의 이야기를 토해 냈다. 그렇게 솔직하게 쏟아낸 나를 그는 특별하게 여겨 사랑해주었다. 준비한 적 없는 가난한 생활에 치여 마음을 안심하고 놓아둘 때가 없던 나는, 금방 그의 연인이 되었고 자주 그를 만나 내 마음을 마음껏 부려 놓고 함께 술을 마셨다. 그때 그와 함께 소주를 마시는 것은 흡사 수혈을 받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사랑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나는 초라한 생활을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거뜬히 견뎌낼 수 있었다. 그렇게 사랑은 내 얼굴에 생긴 그늘을 바로바로 지워 저 깊은 마음속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해 주었다.


비싼 옷도 보석도 없던 그때의 나는 젊음 하나만으로 지금보다 예뻤다. 역시나 멋진 직업도 좋은 차도 없던 그때의 그는 사랑 하나만으로 지금보다 눈부셨다. 하지만 그땐 우리가 그토록 예쁘고 눈부신지 몰랐다. 나는 더 높고 더 우아한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사랑보다 그게 더 중요한 때가 있었다. 더 많은 걸 해 보고 더 좋은 곳으로 가고 싶었던 나는 그를 버렸다. 나는 그토록 반짝이는 사랑보다 더 아름다운 걸 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고, 그것을 위해 사랑을 버렸다. 사랑만으로 아름다울 땐, 그 사랑이 다시 오지 못할 소중한 것인지 모른다. 그 아름다움이 평생 그리워할 찰나의 것인지 모른다. 그렇게 많은 젊음들은 사랑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꿈꾸며 바보처럼 그 예쁜 사랑을 쉽게 버린다.





사랑 하나만으로 눈부시던 시간, 젊음 하나만으로 예뻤던 우리.

그 시절 우리를 다시 보여 주는 영화를 만났다.



'먼 훗날 우리'


젠칭과 샤오샤오는 눈 쌓인 춘절, 귀향하는 기차 안에서 처음 만난다. 베이징에 사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꿈인 샤오샤오는 욕을 잘하는 게 매력인 따뜻하고 귀여운 여자다. 게임 개발자로 베이징에서 성공하는 것이 꿈인 젠칭은 남사친일 때부터 샤오샤오만 좋아하는 소년 같은 남자다. 허름한 쪽방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지만 둘은 사랑과 젊음만으로 예쁘다. 소년 소녀 같이 세상을 모르고 순수한 둘은 함께 꿈꾸며 사랑을 키워 나간다. 콜 센터에서 고객 응대를 하던 젠칭이 진상 고객을 견디지 못하고 직장을 그만두게 된 후부터 둘의 사이는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하루 종일 헤드셋을 끼고 게임만 하는 젠칭에게 지친 샤오샤오는 결국 젠칭을 떠난다. 그들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샤오샤오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여배우의 소녀스러운 풋풋함.

젠칭이 만든 게임과 연결되어 절묘하게 상징적이었던 흑백 화면.

초라하지만 예쁜 그들의 사랑을 닮은 쪽방의 아늑한 영상미.

젠칭 아버지의 오래된 식당과 그곳에서 갓 쪄낸 만두처럼 훈훈한 그의 삶.

샤오샤오가 사랑했던, 그녀를 닮은 예쁜 소파와 그것의 운명.


이런 것들이 슬퍼서 더 예쁜 그들의 사랑과 잘 어울려 보는 내내 나를 뭉클하게 했다.

누구라도 이 영화를 보면, 자기의 젊음과 사랑을 떠올릴 것이다. 샤오샤오와 젠칭이었던 젊음으로 돌아가, 그때의 예쁜 사랑을 다시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젠칭과 샤오샤오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영화를 꼭 보세요!),

나는 그와 다시 만났다.


그때처럼 눈부시고 예쁜 젊음은 없지만, 사랑은 아직 내 옆에 있다. 그 시절 꿈꾸던 멋진 여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나는 아직도 그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내 이야기를 쏟아낸다. 역시나 그 시절 꿈꾸던 멋진 남자는 되지 못했지만, 그는 아직도 따뜻한 눈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


지난주에 싱싱한 봄 도다리에 소주를 마시며, 그에게 우리 이야기를 소설로 쓸 거라 했다. 그와 내가 등장하지 않는 우리 사랑을 담은 이야기. 중장 편이 될 것 같은 긴 이야기를, 그는 눈물이 그렁해진 얼굴로 귀 기울여 들어주었다.


이젠 젊지도 않고 대단한 사람이 되지도 못한 나는

여전히 현실과 꿈 사이의 머나먼 간극을

사랑으로 메우며 살고 있다.

그때만큼은 아닐지 모르나,

사랑하는 지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제는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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