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그녀의 조각들'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이 글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그녀의 조각들'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입니다.(요약이나 단순 리뷰가 아닙니다.) 이 글은 상당 부분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글을 읽는 것이 가장 좋겠지요.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보다 '사실적인 연출, 섬세한 감정 표현, 절묘한 상징'이 탁월한 영화이기 때문에 글을 읽고 영화를 본다면 더 섬세한 눈으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마사와 숀은 가정 분만을 계획하고 있는 부부다. 그들이 마사의 어머니에게 선물 받은 미니밴을 타고 함께 귀가한 날, 마사의 진통이 시작된다. 예정일보다 이른 진통에 당황한 마사와 그녀의 고통을 어떻게라도 덜어주고 싶어 안달하는 숀. 그들은 처음 겪는 고통이 두렵지만, 진통이 멈출 때마다 곧 태어날 새로운 생명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환호한다. 그런데 마사를 도와주기로 한 조산사 바바라는 다른 분만을 돕는 중이라 오지 못하고, 그녀가 추천한 조산사 에바가 오게 된다. 부부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지만, 따뜻하고 차분한 에바의 모습에 곧 그녀를 신뢰하게 된다.
마사의 진통이 점점 심해지고, 에바는 프로페셔널하게 그녀의 분만을 돕는다. 곧 나올 아기의 심박수에 이상이 있음을 감지한 에바는 숀에게 구급차를 호출할 것을 요구하고, 돌발 상황이 생겼을 경우 병원에 가야 함을 마사에게 말한다. 계속된 진통 끝에 아기가 나오게 되고, 딸의 건강한 모습을 확인한 마사와 숀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동을 느낀다. 그런데 갑자기 아기의 숨이 잦아들다가, 결국 멎어버린다. 에바가 아기를 되살리려 애쓰지만, 아기는 다시 숨을 쉬지 못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가정 분만의 긴박한 상황을 롱테이크로 실감 나게 보여준다. 마치 한 몸인 것처럼 가까워 보이는 마사와 숀. 곧 만나게 될 딸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한 그들의 행복한 표정. 고통 끝에 만나게 된 딸을 안고 기뻐하는 부부. 마치 현장에서 실제 분만의 과정을 보는 것 같았다. 나도 마사가 되어 그녀가 진통을 느낄 때 함께 긴장했고, 숀이 되어 그가 딸을 보며 감동할 때 함께 환호했다. 그리고 숨이 멎은 아기를 안고 그들이 울부짖을 때 나도 같이 울었다.
잔인한 영화 전반부의 잔상은 꽤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남았다. 그리고 내가 겪었던 '상실'을 떠오르게 했다.
2003년 5월의 어느 날. 나는 사촌 오빠의 화장장에 있었다. 나와 동갑이었으나 생일이 빨라서 오빠였던 그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나와 결혼할 거라던 예쁘게 생긴 꼬마.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해 늘 땀냄새가 나던 짓궂은 소년. 오래 사귄 여자 친구를 애칭으로 부르며 수줍게 소개하던 훤칠한 청년. 같은 나이에 어른이 된 우리니까 곧 비슷한 시기에 직업을 가지고 가정을 가지고 아이를 가질 거라고. 그렇게 서로 닮은 삶을 살아가며 언제까지고 함께 할 거라 생각했었다.
180이 한참 넘는 건장한 청년은 항아리 하나도 다 못 채울 하얀 가루가 되어 있었다. 내 안에 있던 크고 뜨거운 무언가가 차갑게 식어서 내 몸을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빠져나간 빈자리는 새로운 무언가로 채워지지 못하고 싸늘한 바람만 오랫동안 불었다. 한동안 나는 입맛을 잃었다. 이렇게 하루를 채우며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제 정말 다시는 만날 수 없구나. 불쌍하고 안타깝고 너무 보고 싶어. 허무와 실감과 그리움이 번갈아 찾아오며 나를 괴롭혔다. 그때 오빠와 나는 스물한 살이었다. 성인식을 맞이한 친구들이 키스나 장미, 향수 같은 향긋한 단어를 말하는 소리가 자주 들려왔지만, 나는 그런 시작에 전혀 섞이지 못했다. 시작되자마자 끝나 버린 젊음. 그 슬픔에 눌리어 나는 오랫동안 무겁고 어둡게 가라앉아 지냈다.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주저앉아 아이처럼 엉엉 울던 고모는,
장례식장에서 술에 취해 영정 사진 앞에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왜 대답이 없냐고 계속 묻던 고모부는,
어떻게 그 상실의 시간을 통과했을까.
시간이 흐르며 우리는 모두 서서히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돌아왔다. 상실과 그 아픔이 각자의 가슴에 무엇을 새기고 지나갔는지는 서로 꺼내 놓고 보여 주지 않았기에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 조금씩은, 어쩌면 상당 부분 그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마사와 숀은 어떤 방식으로 상실의 시간을 통과할까.
주변의 예상과 달리 마사는 아이가 죽은 후 바로 직장에 복귀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눈빛은 무언가가 빠져나간 듯 허망하다. 마사를 제외한 모든 가족들은 아이가 죽은 것의 책임을 조산사에게 돌리려 한다. 그녀를 처벌하고 보상을 받는 것만이 상실의 고통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는다. 하지만 마사는 그런 것에 무관심하다. 그녀는 멍한 눈으로 끊임없이 사과를 먹는다. 그런 그녀의 아픔은 숀의 아픔과 연대하지 못한다. 부부는 등을 돌린 채 각자의 방식으로 각각 아파한다. 조산사 에바를 처벌하기 위한 재판이 잠시 휴정되고 마사는 숀이 찍어준 자신과 아기의 사진을 보러 간다. 사진을 보는 마사의 눈은 감격으로 빛난다.
돌아온 재판장에서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 기분이 어땠냐는 판사의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사과향이 났어요......"
계속 사과를 먹고 사과씨를 모아 발아시키려 하던 그녀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말이다. 그리고 조산사를 처벌하는 문제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사건엔 원인이 있겠지만 그걸 여기서 찾진 못할 거예요. 보상이나 돈을 요구한다면...... 그 보상을 받는다고 정말 보상이 될까요? 죽은 애가 돌아오진 않죠. 돈, 평결, 형량 같은 게...... 뭘 되돌릴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 고통을 다른 이에게 전가할 수 있겠어요? 그 사람도 이미 고통스러울 텐데요. 아기도 그런 건 안 바랄걸요. 제 딸은 그런 목적으로 이 세상에 나왔던 게 아니에요."
재판 이후 마사는 사과씨가 발아한 것을 본다. 미완공된 모습으로 시작해 조금씩 공사가 진행되던 다리가 마침내 완공된다. 앙증맞은 여자 아이가 커다란 사과나무 위에 올라가 사과를 따서 베어 먹는 장면이 나오며 영화가 끝난다.
고통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따뜻하지 않다. 그것은 태생적으로 남을 할퀴고 공격하기를 좋아한다. 아이가 죽은 후 서로에게 등을 돌리는 마사와 숀의 모습은 그러한 고통의 본성을 현실적으로 잘 보여준다. 또한 증오나 복수가 상실의 고통을 온전히 해결할 수 없음을 영화는 잘 보여준다. 마사는 상실을 해결하거나 극복하지 않고 응시한다. 아픈 모성은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자기가 잃은 아이가 왜 이 세상에 왔으며 무엇을 원할 것인가, 그 사랑을 어떻게 완성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녀는 상실의 아픔을 겪는 동안에도 오로지 딸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 사랑이 그녀의 고통에 답을 준 것이다.
고통의 바닥을 응시하고 끝까지 딸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은 마사. 그녀의 초점 잃은 눈이 조금씩 생기를 찾아가며 마침내 웃게 되는 과정은 아름다웠다. 상실이 존재에게서 무언가를 앗아가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상실의 고통 속에서도 사랑을 지속하는 존재에게, 상실은 사과나무 같이 탐스러운 무언가를 남긴다는 것을 마사를 보며 알았다.
화가 이중섭은 아들을 잃고 나서 웃으며 그림을 그린다. 그런 그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는 친구 구상에게 "어린것이 혼자 쓸쓸할 것 같아서......"라고 말하며 두 아이와 복숭아가 그려진 그림을 아들의 관 속에 넣어 준다.
잃지 않고 여무는 삶은 없다. 5월의 무성한 신록은 3월의 눈부신 꽃을 잃고 얻은 것이다. 앞으로 살아가며 크고 작은 많은 것들을 잃을 것이다. 결국 잃을 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를, 잃어가는 그 순간에도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사랑하는 마음만은 잃지 않는다면, 상실은 그 빈자리에 탐스러운 무언가를 남길 것이다.
P.S. 자식을 잃은 아픔을 제가 감히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 누구도 타인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처럼 온전히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다만, 형제처럼 사랑했고 아직도 많이 그리운 오빠를 마음을 다해 애도하고, 고모와 고모부가 그 아픔에서 벗어나 조금은 평온한 마음으로 아들을 떠올리기를 기도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