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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May 18. 2021

항상 '남이 끓여준 라면'만 먹는 비법

헬파게티의 추억




어른인 척 그럴듯하게 위장하고 살고 있지만 사실 내 안에는 '아이'가 가득하다. 자연스레 세월이 흐르다 보니 나이를 먹기는 했지만 '기성'의 세계에 한쪽 발 끝만을 살짝 담근 채 철 없이 살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문소리 씨가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오빠'라는 호칭을 쓰면 남편에게 '어리고 귀여운 존재'가 되기 때문에 동등한 관계의 기조를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연인 관계나 부부 관계는 당연히 동등해야 한다. 아이로 취급해서 하는 일마다 간섭을 한다거나, 권위 의식 같은 걸 가지고 훈계나 명령을 한다면 곤란할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내 안에 아이를 꺼내서 뛰어놀게 하고 싶다. 그 아이의 천진함을 알아 봐 주고 그것 또한 나의 일부라 여겨 볼에 뽀뽀를 해 주는 것.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끼리 주고 받을 수 있는 달콤한 것 중의 하나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와 애인이 서로를 '귀여워 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이 없다. 사실 '귀여워 하는 쪽'과 '귀여움을 받는 쪽'이 정해져 있다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존중하는 것'과 '귀여워하는 것'은 별개의 영역이다. 적어도 '연애'에 있어서는.(결혼은 안 해봐서 모르겠다.)



그래서 가끔 애인에게 어린이날 선물을 사달라고 한다. 내 안에 꼬마의 수준에 맞추어 어피치 인형이나 초콜릿 같은 걸 사주던 애인이 이번에는 꽃을 구독해 주었다. 덕분에 구독한 꽃이 시들어가고 있음에도 내 마음은 분꽃으로 귀걸이를 만들어 귀에 꽂고 신이 났던 아이 때처럼 파릇해졌다.




애인과 사귄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내 안에 숨겨둔(?) 아이를 들켜 버린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스물일곱이었다. 지금보다 몸은 말랐지만, 얼굴은 덜 빠진 젖살로 통통했던 때. 그 무렵 애인은 가족들과 같이 살던 집에 (어쩌다 보니) 혼자 살고 있었다. 애인의 집은 오래된 맨션이었는데, 어릴 적 우리 가족이 살았던 주택과 묘하게 비슷했다. 어릴 적 추억과 그의 훈훈한 마음이 섞여 따뜻하고 너그러운 느낌을 주는 그 집을 나는 좋아했다. 그는 자기가 없을 때 와서 쉬라며 깨끗하게 집 청소를 해 두고, 맛있게 먹는 내 모습이 좋다며 종종 집에 나를 데려가 '야끼소바' 같은 요리를 해 주곤 했다. 내 방조차 잃었던 싸늘한 시절을 겨우 참아 내고 있던 나는, 그런 그의 배려에 마음이 조금씩 열리고 있던 참이었다.


같이 쉬는 날이라 그의 집에서 소설책을 읽고 티비를 보며 빈둥거리던 날이었다. 출출해진 우리는 짜파게티가 먹고 싶었다. 항상 그가 해준 요리만 받아 먹던 터라, 나도 뭔가를 해 주고 싶었다. 이건 내가 끓여 주겠다며 자신있게 짜파게티를 끓이기 시작했다. 세 개를 한꺼번에 끓이는 건 처음이었지만, 한 개나 두 개를 맛있게 끓였던 나인지라 별 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나에게 여성스런 센스가 있다는 걸 이 짜파게티를 통해 확실히 보여주리라는 야심찬 마음으로 세 개의 짜파게티를 공들여 끓여서 애인 앞에 내놓았다.


*이미지 출처: 영화 ‘기생충’



맛있게 먹으란 나의 말에 한 젓가락을 후루룩 먹은 그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왜? 맛 없어?"

라고 말하며 나도 한젓가락 먹어 보았다. 맙소사. 면발이 너무 심하게 불어 있었다. 불은 면발이 입안에서 버석하게 뭉개졌다. 이제껏 경험해 본 적 없는, 설명하기 힘든 지옥의 맛. ㅋㅋㅋ 내가 젓가락을 놓으니 애인도 젓가락을 놓았다.


그런데 갑자기 너무 슬퍼졌다. 꼭 맛있게 끓여서 '안 해서 그렇지 하면 잘 하는' 나의 요리 센스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나는 슬프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어 버리는 애 같은 구석이 있다. 늘 참으려하면 할수록 더 나오는 눈물이 눈 안에 흥건하다가 짜파게티 그릇에 똑 떨어졌다.

당황한 그는

"자기 왜 울어?"

라고 하며 내 눈물을 닦아주더니, 짜파게티를 다시 먹기 시작했다.

"나름 먹을 만하네."

라고 하며 그는 그 헬파게티 세 개를 혼자 다 먹었다.......ㅋㅋㅋㅋㅋ(지금이면 안 먹었을텐데. 미안해 토봉아.ㅋㅋㅋㅋㅋ)


이후 애인과 같이 있을 때 내가 라면 근처에만 가도 그는

"자기는 먹기만 해. 내가 끓여줄게."

라고 만류하며 야릇한 미소를 짓는다. ㅋㅋㅋ

결국 나는 '늘 제일 맛있는 라면(=남이 끓여준 라면)을 먹는 사람'이 되었고, 애인은 '짜파게티 요리사'가 되었다. 갖은 재료를 넣은 그가 끓인 라면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서 지금은 웬만한 식당에서 끓여주는 것보다 훨씬 맛있다. 다 나의 공이 아닌가 싶다. ㅋㅋㅋ




휴일에 오랜만에 화장을 하고 나가 애인에게 묻는다.


"오랜만에 화장하니까 이쁘지?!"

"당연히 이쁘지~우리 제봉이는 항상 이쁜데, 다섯 살짜리 꼬마처럼 무섭고 사악하기도 하지! ㅋㅋㅋㅋ"


그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가 말하는 '사악함'이란 아마도 '헬파게티 사건'에서 시작된 게 아닐까 싶다. ㅋㅋㅋ





가시돋친 장미처럼 도도하고 싶기도 하고, 매혹적인 러넌큐러스처럼 비밀을 숨겨두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때론 귀여운 프리지아처럼 난만한 나를 활짝 열어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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