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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May 28. 2021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1






79.57kg


세상에! 6키로나 빠졌잖아! 연애를 하면 살이 쭉쭉 빠진다며 염장을 지르던 지윤이 말이 맞구나. 기분이 좋아진 나는 오랜만에 전신 거울 앞에 서 본다. 하......여전히 뚱뚱하다. 거울 옆 행거에는 살을 빼면 입으려고 사 둔 꽃무늬 원피스가 걸려있다. 저걸 입으려면 대체 몇 키로를 더 빼야 하나.


뚱뚱한 여자로 산다는 건 외로운 일이다. 사람들은 뚱뚱한 여자의 앞 모습을 잘 보지 않는다. 시선은 늘 등 뒤로 따라온다. 그 시선에서 경멸과 야유가 담긴 감탄사들이 환청처럼 들려온다. 환청이 실제로 들릴까 두려워, 나는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하는 편이다. 나처럼 숨어있는 뚱뚱한 사람들이 많을테니까 뚱뚱한 사람의 수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뚱뚱한 사람끼리 모여서 사는 나라가 생기지 않는 이상, 나는 휴일의 유원지나 백화점 같은 곳에 웬만하면 가지 않을 것이다.


가끔 여자들이 용기를 주기도 한다.

"하나씨, 하나씨 살 빼면 얼굴이 귀염상이겠는데? 피부가 하얗고, 눈이 동그랗잖아."

라고 말하는 이 대리님의 가는 목과 허리를 보면 용기는커녕 짜증이 솟구치지만, '뚱뚱한 게 성질까지 더럽다.'는 말은 듣기 싫어

"고마워요. 이대리님."

이라고 웃으며 대꾸해 주며 뒤에서 째려본다. 이 대리의 평소 성향으로 봤을 때, 저 말은 분명 나를 위한 게 아닐 게다. 예쁜데 성격까지 착한 여자가 되고 싶은 이 대리 자기를 위한 말이겠지. 사람들은 몸이 뚱뚱하면 성격도 둔할 거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늘 뚱뚱한 내게 저런 성의 없는 멘트를 위로랍시고 날리는 거겠지.


뚱뚱한 사람들의 개성은 늘 그 뚱뚱함에 가려진다. 눈이 동그랗든, 피부가 하얗든, 치아가 고르든, 키가 크든......어떻든 간에 그저 '뚱뚱한 애'로 불린다. 그리고 '뚱뚱한 여자'나 '뚱뚱한 남자'로 커 간다. 곧 '뚱뚱한 아줌마'가 되고, '뚱뚱한 할머니'로 늙어가겠구나'라며 습관적으로 체념하며, 그저 먹는 낙으로 하루 하루를 지내왔다.


윤 과장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하나씨는 화장을 참 잘하네~ 피부가 하얘서 화장빨이 잘 받는 건가? 립스틱 색깔도 하나씨랑 너무 잘 어울리고. 혹시 그런 쪽으로 공부를 해 본 적이 있어? "

 "하나씨 소설 읽는 거 좋아하는구나? 담에 우리 같이 서점 한번 갈까?"

"아이스 카페라떼 시럽 없이 우유 많이. 이렇게 마시는 거 좋아하지?"


늘 뚱뚱했지만 내가 남자의 관심을 처음 받아보는 건 아니다.


한번은 해변가에서 자기 이상형이라며 어떤 남자가 말을 걸어 오길래 '막돼먹은 영애씨' 같은 드라마를 떠올리며 '그래 나 같은 애를 좋아해 주는 남자도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잠시 설렜었다.

"잠시만요."

라고 말하며 그 남자는 일행의 곁으로 갔다. 그리고 일행들과 함께 킥킥킥 웃어 댔다. 그는 다시 내게로 오지 않았다.


또 한번은 다이어트 보조제를 사러 갔을 때였다. 어떤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저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닌데요. 그쪽이 너무 맘에 들어서 그러는데, 딱 한 번만 만나주시면 안 돼요? 만나보고 싫으시면 안 만나셔도 돼요."

라며 정중하게 명함을 건넸다. 그 남자와는 사귀기까지 했다.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 구나. 초고도 비만인 여자도 사랑이란 걸 할 수 있구나. 싶어 며칠을 설레 잠도 못잤었다.

"저 하나씨랑 오늘 밤 같이 있고 싶은데, 안 될까요? 너무 좋아서 헤어지기 싫어요."

라는 말에 그 남자의 집에서 함께 밤을 보냈다. 나도 멀쩡한 그 남자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가슴을 주무르지 않고 계속 내 뱃살만 주무르고, 내가 엎드려 핸드폰을 보고 있을 때 내 엉덩이와 허벅지 사진을 찍는 그 새끼는 전혀 멀쩡하지 않은 놈이었다. 너무 놀라 당장 그 집에서 나오고 싶었지만, 그래도 내 첫 연애의 위상을  변태와의 웃긴 에피소드 정도로 격하시키고 싶지 않아, 그럴 듯한 구실로 평화롭게 헤어지자는 생각으로 그 밤을 버텼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않나? 뱃살이 귀여워서 좋아할 수도 있지 않나? 라며 애잔한 자위를 하다, 잠든 그의 피씨 사진첩을 본 나는 경악했다. 거기엔 나처럼 뚱뚱한 여자들의 배, 엉덩이, 허벅지 사진이 빽빽하게 담겨 있었다. 소리를 지르고 그 새끼의 뒤통수를 갈기고 싶었지만, 나는 그냥 조용히 그 집을 빠져나왔다. 다시는 그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지윤이 같은 예쁜 년들은 자기의 지난 연애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 놓기를 좋아하지만, '장난'이 아니면 '변태'일 뿐이었던 나의 남자들(?)에 대해 나는 아무에게도 말해본 적이 없다. 어떤 낯선 남자가 말이라도 걸어 오면, 어떤 장난일지 어떤 변태일지를 빠르게 간파하느라 예민한 촉을 곤두세우곤 한다. 남의 약점을 감싸고 어루만져주는 세상은 없었다. 상처난 곳을 날카로운 것으로 깊이 찌르면서 박수를 치며 웃어대는 악마같은 인간들을 무력하게 피해 다니는 것이, 표나는 약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내 운명이라 여기며 체념할 뿐이었다.


하지만 윤과장님은 달랐다. 장난도, 변태도 아니었다. 그 사람은 나에게서 '뚱뚱함'이라는 장막을 걷어 내고 그 안에 있는 진짜 '나'를 알아봐 주었다. 알게된 지 석 달도 안 되어 내가 소설책과 화장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봐 주다니. 하지만 끔찍한 연애사(?)를 가진 나이기에, 일말의 의심을 거두기는 힘들었다.


"하나씨, 하나씬 왠지 이런 색 조합을 좋아할 것 같아서 골라봤어. 하나씨가 매일 입고 다니는 옷 색깔이 이런 파스텔 톤이잖아. 어떼?"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파스텔 톤을 좋아한다. 하얀 색에 가까운 연핑크, 연하늘, 연보라......그런 옷을 입으면 더 뚱뚱해 보인다고 지윤이가 늘 충고해 주었기 때문에 그 위에 늘 검은색이나 감색 자켓을 걸치고 다녔다. 근데 윤 과장님은 그 검은색 자켓 안에 연핑크나 연보라를 눈여겨 본 것이다. 과장님이 내민 꽃다발은 부풀어 오른 내 마음처럼 화사했다. 연핑크색 작약, 연보라색 리시안셔스, 연주황색 장미.


꽃을 받은 그날 이후로 나는 '일말의 의심'을 거두고,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평소라면 가지 않았을 백화점에 가서 실제 내 사이즈보다 훨씬 작은, 지윤이에게나 들어갈 법한 꽃무늬 원피스를 샀다. 그 원피스에는 그날 받은 꽃 같은 연한 파스텔 톤의 잔꽃 나염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잦은 찬사를 보내는 것에 비해 더디게 내게 다가오는 윤 과장님이 좀 의아하긴 했지만, 내게도 살을 빼며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괜찮았다. 괜찮은 남자들이 오히려 천천히 다가온다던 지윤이의 연애론을 새겨 들어 놓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윤 과장님은 분명 괜찮은 사람 같다.


살이 빠져 기분이 좋아진 나는 출근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회사 앞 꽃집. 잠시 멈추어 꽃을 고른다. 내 자리에 놓아 둔 윤 과장님이 주신 꽃이 거의 시들었다는 걸 떠올리며. 하늘색 수국, 핑크색 장미, 거의 하얀색에 가까운 연보라색 카네이션에 유칼립투스를 섞는다.

"아가씨 기분 좋은 일 있나봐? 웃는 게 수국처럼 환하네. "

꽃집 아주머니의 뻔한 칭찬이 내 진심을 건드려 나는 진짜 수국처럼 환하게 웃는다. 상쾌한 생화향이 코끝에 닿는다. 아......지윤이가 말하던 연애하는 맛이란 이런 걸까.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내 눈은 과장님부터 찾는다. 어? 늘 나를 보면 웃어주던 과장님의 표정이 좀 이상하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거래처랑 트러블이 생긴 걸까. 윤 과장님은 일을 잘하기로 유명하다. 우리 회사는 사원이 100명이 넘을까 말까 한 규모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범한 광고 회사이다. 신입을 환영하는 회식 때부터 윤  과장님은 이미  '초고속 승진'으로 유명한 최연소 과장이었다. 그런 과장님에게 걸맞은 여자가 되려면 과장님의 표정 변화에 좀 익숙해져야겠지?!


"과장님, 일찍 나오셨네요. 저 오는 길에 꽃 사왔어요. 예쁘죠? 접때 과장님이 사주신 꽃이 시들어서요. 과장님 자리에도 좀 꽂아 드릴게요."

"그래? 고마워. 이쁘네~"


바쁜 것 같은 표정으로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나가는 윤 과장님. 예의 그 찬사를 기대했던 나로써는 좀 실망스러웠지만, '사람이 어떻게 늘 같을 수가 있겠어?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며 사온 꽃을 적당히 나누어 내 자리와 과장님 자리의 꽃병에 꽂아 둔다. '아름다움'이라는 쓰임이 끝난 시든 꽃들은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집에 가져가 말리기라도 할껄 그랬나. 구겨져 쓰레기통에 담긴 시든 꽃들에 괜히 마음이 쓰인다.






점심을 먹고 들어온 회사 안이 시끄럽다.


"윤 과장 이 새끼 어딨어? 윤 과장 어딨냐구!!"

"저기...여기서 이러시면 안 돼요. 윤 과장님과의 일은 개인적으로 해결을......"

"뭐? 개인적으로 해결? 지랄들 하고 있네. 여기 '동진기획' 사원 여러분!! 윤 과장 그 새끼가 어떤 인간인 줄 알면 다들 놀랄껄? 아하하하하하하."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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