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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Sep 17. 2021

경양식을 먹던 날

변주(變奏)





"지수는 크니까 엄마를 더 닮았네? 얼굴은 엄마랑 똑같은데, 표정은 어찌 그리 달라? 하긴. 엄마도 학교 다닐 땐 지수처럼 그랬어."

"엄마보다 제가 훨씬 재밌을 것 같죠? 근데 엄마가 저 같을 때가 있었다구요? 진짜?"

"하하하 내가 말재주가 없어서 어찌 말해야 될진 모르겠는데 느이 엄마도 너처럼 그럴 때가 있었어."

"엄마 학교 때 얘기 좀 해 봐요. 스테이크 완전 맛있는데요? 아저씨 오늘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녜요?"


엄마의 학교 때 얼굴과 내 어릴 때 얼굴을 다 알고 있는 이 남자는 엄마의 애인이다. 애인으로, 친구로, 그리고 다시 애인으로 오랫동안 엄마의 삶에 등장했던 사람. 그러면서 나와는 어떤 것도 섞이지 않은 사람. 환갑이 머지 않은 두 사람이지만,  표정이나 행동만 봐서는 이십 대 연인 못지않다. 엄마가 좋아하는 와인을 묻지도 않고 시키고, 엄마가 좋아하는 피아노가 가까운 자리를 고르는 이 남자는 이십 년 전에도 오늘처럼 나를 안심시켰었다.


엄마가 나 같을 때가 있었다니. 그런 말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엄마와 나는 얼굴 말고는 닮은 게 없는 모녀다. 지금 앞에 놓인 고기만 봐도 그렇다. 나는 핏물이 살짝 베어 나오는 레어, 엄마는 바짝 익혀 붉은기가 없는 웰던이다. 오늘은 엄마보다는 나를 위한 자리인지라, 내가 좋아하는 메뉴를 고른 게 분명하다. 나는 익지 않은 생선이나, 덜 익은 소고기를 무척 좋아한다. 부드러운 고깃살을 입안에 넣고 천천히 씹으면 핏물이 살짝 섞인 육즙이 고깃살과 입안을 적신다. 고기가 반쯤 넘어갔을 때 와인을 한 모금 머금으면 입 안에 남은 고기 향이 붉그레한 포도향으로 덮인다. 남은 고깃살과 와인이 목으로 넘어갈 때 느껴지는 묵직하고 떫은 맛이 고기의 기름진 향을 깔끔하게 잡아준다.


이렇게 고기맛을 음미하는 나를 보며 엄마가 웃고 있다. 나와 같은 그 날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날도 엄마는 고기를 먹는 나를 보며 저렇게 웃고 있었다. 나만 이렇게 고기를 맛있게 먹는 게 엄마에게 미안했던 그 날. 오늘과 다르게 저 웃음 끝에 젖어버리던 눈을, 어린 나는 보았었다.




가로가 긴 네모 모양에 미미가 그려진 핑크색 가방을 메고 학교에 다니던 때였다. 점심을 못 먹고 배가 고파 마치자 마자 집으로 달려왔던 걸 보면, 오후 수업을 하지 않았던 일학년 때나 이학년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 무렵 엄마는 학교가 파하는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내가 먹을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현관에 가득하던 진한 카레 냄새나 매콤한 김치찌개 냄새 같은 것들이 생각난다. 그런데 그 날은, 그런 음식 냄새 대신 엄마의 화장품 냄새가 더 진하게 났다. 평소와 다르게 분칠을 하고 루즈를 바른 엄마가 쇼파에 앉아 나를 맞아 주었다.


"엄마, 나 배고픈데? 어디 가?"

"맛있는 거 먹으러 갈 거야. "


원래도 충분히 차분한 엄마는, 그 날 더 차분했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그 표정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체념이었다. 어른이 되어야 체득할 수 있는 말. 고등학교 때 문학 선생님이 진지한 표정으로 '지속되는 불행으로 무뎌진 주인공'을 설명하며 '인생에 대한 체념적 태도'라는 말을 했을 때, 그리고 단순한 포기와는 다르다며 체념이 뭔지를 오랫동안 설명했을 때. 그 때 나는 단번에 그 날의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는 별로 더럽지도 않은 내 얼굴을 다시 씻기고, 별로 흐트러지지도 않은 내 머리를 다시 묶어 주었다. 나를 만지던 엄마의 손이 말할 수 없이 부드러웠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줄 때 엄마의 가슴에서는 여느 때와는 다른 향긋한 냄새가 났다. 엄마는 내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링처럼 만들어 레이스 리본으로 묶어 주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봉긋한 퍼프 소매의 체크 무늬 원피스를 입혀 주었다. 나가기 전 현관에 쪼그리고 앉아 다정하게 구두까지 신겨 주었다. 엄마 친구 아저씨가 내 생일 선물로 줬다는 빨간 애나멜이 반짝반짝하고 가운데 큐빅 리본이 달린 메리제인 슈즈.


예쁜 옷에 예쁜 구두까지 신은 나는, 너무 신이 나서 배고픈 것도 잊고  엄마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날씨가 좋았다. 적당히 바람이 불어 내 원피스도 엄마의 스커트도 살랑살랑 춤을 췄다. 따땃한 햇살을 등지고 큰 길로 나와 오거리가 있는 길까지 꽤 오래 걸었다. 여느 때처럼 나는 그 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떠들었고, 말수가 없는 엄마는 "응, 우리 지수 그랬어?" 같은 말을 하며 들어 주었다. 오거리를 지나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남포동처럼 번화한 거리가 나왔다. 큰 건물 사이사이로 티비 광고에서 본 것 같은 브랜드의 옷 가게나, 사람들이 붐비는 식당과 카페가 보였다.


이십 분 쯤 걸었을까. 엄마는 '비비추'라고 적힌 주황색 간판이 달린, 오래된 건물의 이층으로 나를 데리고 올라갔다. 턱시도를 입은 아저씨가 문을 열어 우리를 맞아 주었다. 아저씨 가슴에 달린 '비비추 경양식 지배인'이라고 적힌 이름표가 아직까지 기억난다. 어둡고 아늑했다. 동그란 오크색 테이블, 페이즐리 무늬가 고풍스러운 벨벳 쇼파, 자리마다 드리워진 오렌지색 조명. 지금 떠올려 보면, 보고만 있어도 올드팝이 흘러나올 것 같은 곳이었다. 엄마는 그 때도 음악이 잘 들리는 자리가 좋았는지 엘피가 잔뜩 꼽힌 진열장과 커다란 스피커가 양 옆으로 놓인 전축이 가까운 자리를 골랐다. 턱시도를 입은 다른 아저씨들이 와서 의자를 빼 주고 메뉴판을 주고 갔다.


"지수는 뭐 먹을래?"

"난 돈까스!"


크리스마스 때 아빠랑 갔던 경양식 집에서 먹었던 돈가스가 생각난 나는 아무 고민 없이 돈가스를 외쳤다. 엄마는 자기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돈가스 두 개와 콜라, 그리고 오비 맥주를 주문했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모자처럼 접힌 하얀 냅킨을 펼쳐서 자기 허벅지 위에 펼쳐서 깔았다.


"지수도 이렇게 해 봐."


나는 엄마를 따라했다. 돈가스보다 먼저 나온 오비 맥주를 따라 몇 모금 마신 엄마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나는 또 엄마를 따라 콜라를 한 모금 마셨다. 엄마는 아무 말이 없었다. 스피커에서는 어린 내가 듣기에도 왠지 좀 슬픈 느낌이 나는 기타 연주곡이 흘러나왔다. 그 날 따라 더 가늘어 보이던 엄마의 팔목이, 아무말도 하지 않고 음악을 따라 허밍 소리만 흘러나오던 엄마의 작은 코와 입이, 나는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하얀 패브릭이 장식된 라탄 바구니에 모닝빵과 딸기쨈이 담겨 나왔다. 뒤이어 김이 하얗게 피어 오르고 부드러운 향이 나는 크림 스프가 나왔다. 엄마가 테이블 구석에 있는 후추통을 가져와 거꾸로 들고 훅훅 흔들자 까맣고 고운 후춧가루가 뽀얀 스프 위로 가볍게 떨어졌다. 냄새만큼이나 맛도 부드러워 숟가락에 묻은 마지막 스프까지 깨끗하게 핥아 먹고 있으니, 돈가스가 나왔다. 레이스 식탁보 위에 놓인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돈가스 접시가 생각난다. 갈색 소스로 몸을 반쯤 덮고 있는 바삭하게 익은 돈가스, 그 옆에 마요네즈에 버무려진 마카로니와 장난감처럼 빨간 체리가 들어간 후르츠 칵테일, 그리고 작은 나무처럼 생긴 브로콜리가 놓여 있었다. 그 접시보다 조금 더 작은 접시에 동그랗고 납작하게 펴진 밥도 담겨 나왔다.


"이렇게 왼 손으로 포크를 잡고, 오른 손으로 나이프를 잡아 봐. 그리고 포크로 돈가스를 살짝만 누르고, 오른 손으로 살살 이렇게 썰어 봐. 힘을 너무 많이 주지 말고 살살. 이렇게. 맞아 맞아 그렇게. 우리 지수 잘 한다! 한꺼번에 다 썰지말고 먹으면서 썰면 돼."


한참을 안 웃던 엄마가 웃자,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신나게 돈가스를 썰어 먹기 시작했다.  엄마는 돈가스를 거의 먹지도 않고, 맥주만 마시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내 입으로 돈가스가 들어갈 때마다 살짝씩 나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웃고 있는 엄마를 보며 먹는 돈가스는 아빠랑 크리스마스 때 먹은 돈가스보다 훨씬 맛있었다. 바삭바삭한 튀김 안에 고소한 고기가 두툼하게 씹혔다. 고기맛과 튀김맛보다 거기에 발린 새콤한 소스가 더 맛있어, 나는 고기를 씹으면서 포크로 그 소스를 더 찍어서 쪽쪽 빨아 먹었다.


"지수야 맛있어? 여기 또 오고 싶어?"

"응! 진짜 맛있어! 따봉! 엄마도 맛있어?"


엄마는 엄지를 들어 활짝 웃고는 내 볼에 뽀뽀를 했다. 엄마 입술이 뜨거웠다. 돈가스도 맛있고, 예쁜 옷에 예쁜 구두까지 신어 들떴지만, 엄마는 슬퍼 보였다. 나는 혼자서 돈가스를 너무 신나게 먹은 게 미안해져 엄마를 쳐다봤다. 멍하게 허공을 쳐다보며 울 것 같은 표정을 한참 짓다가, 내가 쳐다보는 걸 깨닫고 나와 눈이 닿는 순간에만 웃어 보였다. 웃으면서도 엄마의 눈안에는 물기가 가득했는데, 그게 흘러 내릴까봐 무서워 나는 엄마한테 아무 말도 못했다. 화장실에 다녀온다던 엄마는 카운터 옆에 있는 공중 전화로 오랫동안 누구와 통화를 했다. 엄마와 통화를 하는 상대방도 나처럼 말이 많은 건지, 엄마는 입을 잘 벌리지 않고 듣고만 있는 것 같았다. 통화를 끝내고 돌아온 엄마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충혈된 눈 주위로 검게 화장이 번져 있던 게  기억난다.


핸드백을 챙겨 다시 화장실에 간 엄마는, 눈가가 말끔해져 돌아왔다. 발그레하던 볼도 다시 하얘졌다. 내 입가에 잔뜩 묻은 돈가스 소스를 냅킨으로 닦아주고, 디저트로 아이스크림과 커피를 시켰다. 엄마는 나를 안아 자기 무릎에 앉힌다. 나는 엄마의 정돈된 얼굴에 안심이 되어 엄마 품을 파고든다. 그러면 엄마는 유치원 때처럼 아이스크림을 떠먹여 준다. 나는 아기처럼 어리광을 잔뜩 부리며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엄마가 떠먹여 주는 아이스크림을 끝까지 받아 먹는다. 커피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엄마는 냅킨을 들어 다시 내 입을 깨끗하게 닦아 주고 내 이마에 뽀뽀를 해 준다.


"지수야 좋아?"

"응!"

"뭐가 젤 좋아? 예쁜 옷 입어서? 맛있는 거 먹어서?"

"둘 다! 헤헤헤"

"우리 지수는 지금처럼 예쁜 옷 입고, 먹고 싶은 것만 먹으면서 살아."

"응!"

"이제 집에 가자!"


라고 말하며 과장되게 웃고는 내 손을 잡고 일어선다.


그 날 나는 엄마에게서 다른 얼굴을 봤다. 우리 집과 아빠와 내가 전부일 것 같았던 엄마였는데, 그 날 보니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다른 세계(이를테면, 엄마가 통화를 했던 사람이 있는 세계)로 엄마가 가 버릴까 봐 나는 그 날 잠들기 전까지 엄마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그 날 아빠는 오랜만에 일찍 집에 들어왔다. 빨간 장미꽃에 안개가 섞인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풍성한 꽃다발을 들고. 엄마는 카라나 백합 같은 은은하고 하얀 꽃을 좋아하는데, 아빠는 엄마와 헤어질 때까지 그걸 몰랐다. 아빠로서는 억울할 것이, 아마 엄마는 아빠에게 자기가 무슨 꽃을 좋아하는지 말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엄마는 졸업도 하기 전에 나를 임신해서 아빠와 결혼했다. 아빠는 엄마가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하던 회사 사장의 동생이었다. 작은 회사의 부사장이라는 그럴 듯한 직업과 넉살 좋고 사교적인 성격을 엄마의 주변 사람들은 좋아했었다 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다들 그렇게 하는 거라 생각했던 엄마는, 서둘러 학교를 중퇴하고 결혼을 결정했다. 입학금을 겨우 마련해 억지로 대학에 진학해 공부보다 아르바이트를 더 많이 해야했던 당시 외가의 형편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 무렵 엄마의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시간까지 회사 앞에서 기다리다 엄마가 나오면 근처의 만두 가게로 엄마를 데려가 엄마 입에 만두를 넣어 주던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가 한참을 기다려도 엄마가 나오지 않던 날 밤, 아빠와 엄마는 회사의 숙직실에서 나를 만들었다. 기다리기를 참 잘하던 그 남자는 그 날 만들어진 내가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다시 엄마 입에 만두를 넣어줄 수 있게 되었다.


아빠는 화가 나면 갑자기 돌변해서, 재떨이를 아무 데나 집어던지고 떠올리기도 끔찍한 욕을 뱉으며 엄마의 머리채를 잡았다. 휴가철이면 집을 나가 파친코에 돈을 뿌리고, 동네 주점의 젊은 여자와 몇 주 씩 여행을 가 돌아오지 않기도 했다. 나에게는 좋은 아빠였다는 점과 얼핏 멀리서 보면 괜찮은 가장처럼 보인다는 점이 엄마로서는 가장 큰 아빠의 단점이었을 것이다. 아빠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엄마는 나를 임신하고 나서 알게 되었다. 외가로 도망을 가고, 이혼을 하겠다며 발악을 하던 엄마는 언젠가부터 내가 '체념'이라는 말을 처음 배웠을 때 떠올린 그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잠결에 안방에서 삐져나오는 아빠의 큰 소리를 들은 날과 엄마가 나를 예쁘게 입혀 비비추에 데려 갔던 날이 멀지 않게 붙어 있었다는 걸, 나는 비비추의 돈가스를 여러 번 먹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그것은 엄마에게 어떤 '의식' 같은 것이었다. 곱게 단장한 엄마를 보며 나도 엄마처럼 예쁜 어른이 되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눈물을 잔뜩 머금은 엄마의 어색한 웃음을 보며 나는 절대 엄마처럼 외로운 어른이 되진 않을 거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하며 자랐다.  내가 좋아하는 인형은 잘 외워두고 크리스마스면 머리맡에 놓아 주던 아빠가 왜 꼬마인 나도 아는 엄마가 좋아하는 꽃을 전혀 모르는지. 왜 엄마는 자기가 좋아하는 꽃에 대해서 아빠에게 한 번도 설명해 주지 않는 건지. 왜 서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토록 오랫동안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한 집에 사는 건지.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원치 않는 삶을 살아가는 어른들의 이상한 태도를 나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고등학생이 되어 나에게도 엄마가 모르는 사생활이 생길 때까지, 엄마는 종종 그렇게 나를 데리고 나가 예의 그 의식을 치렀다. 그곳은 비비추이기도 했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통나무로 된 피자집이기도 했고, 나중에는 지금처럼 코스로 스테이크가 나오는 천장이 높은 레스토랑이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나는 거의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엄마 옆에 있어 주었다. 그리고 최대한 맛있게 먹으며 웃는 얼굴을 보여 주었다. 처음엔 엄마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지만 그 두려움은 갈수록 이해나 연민 같은 걸로 변해 갔다.


두려움보다는 이해와 연민이 깊어지던 즈음, 엄마는 가끔 그 의식에 어떤 아저씨를 데려왔다. 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 엄마의 입에 만두를 넣어주고, 아주 오랫동안 엄마를 기다린 남자. 지금은 엄마에게 나만큼이나 가까운 사람이 되어 엄마가 좋아하는 술을 미리 주문해 주는 남자. 엄마의 어색한 웃음에 사춘기도 무색해진건지, 나는 한참 예민하던 시기에 아저씨를 보고도 놀랐다기보다 안심했다.

"엄마 학교 다닐 때 친했던 친구야."

라는 엄마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것도 당연히 아니다. 아빠와는 다른 눈으로 엄마를 쳐다보는 아저씨를 보며, 엄마에 대한 왠지 모를 미안함과 죄책감 같은 것들을 잠재울 수 있었다. 엄마에게도 엄마가 아닌 삶이 있다는 것과, 엄마에게도 애인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로는 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식사 테이블이 치워지고 디저트로 케잌과 커피가 나왔다. 커피 종류가 꽤 다양했다. 그 역시 나를 배려한, 사실은 엄마를 배려한 아저씨의 각별함일 것이다.


"커피도 엄마랑 취향이 완전 다르네. 진짜 얼굴만 똑같은 모녀네. 지수도 만나는 남자 있지? 내가 너무 당연한 걸 물어 보나?"

"만나고 있는 건 당연하니까 몇 명 만나는지를 물어봐."

"엄마, 미쳤어? 나 그런 애 아니거든!"

"하하하 그러네. 우리 지수 정도면 그런 질문을 해야지. 요즘은 몇 명 만나고 있어, 지수야?"

"아 아저씨까지 왜 그래요? 큭크크 요즘은 귀찮아서 한 명만 만나고 있는데, 괜찮은 남자 있음 소개해줘요, 갈아 타게."

"어떤 스타일 좋아해? 성격이 이렇게 다른데, 이상형도 엄마랑은 또 완전 다를 거 아냐?"


엄마는 과테말라 안티구아 같은 묵직한 맛이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나는 이디오피아 예가체프 같이 부드럽고 가벼운 산미향이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느긋한 빗소리 같은 피아노 연주가 듣기 좋다. 적당히 취해 내 앞에서 웃고 있는 늙은 연인이 보기 좋다. 테이블 밑으로 내려가 있는 두 손은 맞잡혀 있을 것이다. 엄마는 더 이상 맛있는 음식을 앞에 놓고 멍한 표정을 짓다가 울지 않는다. 덕분에 나는 이제 어떤 연민도 불안도 없이, 입 안 가득 과일 냄새가 상큼하게 퍼지는 예가체프의 산미향을 오랫동안 즐길 수 있다.


                                                                                                                                                 -끝-



어릴 적 엄마는 가끔 저와 동생을 예쁘게 입혀서 분위기가 좋은 경양식 집에 데려가곤 했어요. 난데 없이 케잌을 사와서는 촛불을 껐던 기억도 있고요. 예민한 아이였던 저는 그런 엄마의 행동 너머에 보일 듯 말 듯한 체념과 다짐 같은 것들을 보았어요. 그러면서 엄마와 전혀 다른 여자로 컸지요. 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엄마가 아닌 또 다른 멋진 자리가 존재하기를, 또 엄마가 아닌 존재로서도 사랑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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