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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Sep 10. 2021

여름 도둑 3

이제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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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빨간 닭발


나는 진심으로 대할 사람이 필요했다봐. 물개랑 친구처럼 자주 놀았어.  요즘 애들이 말하는 남사친? 그런 것처럼. 근데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걔가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어. 아무래도 태오같진 않았겠지? 신나게 놀다가 갑자기 집에 가고 싶고 그랬거든. 그애가 싫은 건 아니었는데 말야. 오랜만에 만난 사람을 보고 부끄러워서 엄마 뒤에 숨고 싶은 애처럼, 순간순간 태오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걸 스카우트 캠핑 갔을 때 엄마 보고 싶어질 때처럼 말야. 그래서 무언가 더 깊고 가깝길 기대하는 그애의 눈빛을 무시하고,  '나 이제 혼자 있고 싶어.'라는 표정으로  갑자기 집으로 들어가 버리길 자주 했어.


그래도 나는 태오가 없는 생활에 점점 적응해갔어. 익숙한 것도 상대적인 거라 그때 제일 편한 남자는 물개였지. 네가 있었으면 또 좀 달랐을까? 그건 아닐 것 같아. 남자랑 여자는 다르지. 이런 말을 읽을 때 네 표정이 어떨까? 니가 그때 술취해서 막 그랬었잖아 나보고. 남자없이 못 사는 년이라고. 나는 넌 안 그런지 아냐면서 깔깔거리고. 그땐 네가 어떤 앤지도 모르고.


더 더워지고 있었어. 민소매에 핫팬츠를 입고 나가도 땀이 끈적해지는 진짜 여름. 가을이 되어 떠올리는 여름이 이렇게 맛있을 줄 몰랐어. 더 빨리 이 이야기를 꺼낼 걸.


신세계시지비에서 물개랑 설국열차를 본 날이었나봐. 그날따라 좀 여성스러 보이고 싶었나? 소매가 없는 검은색 미니 드레스에 연한 핑크색 샌들을 신고 나갔던 게 기억나. 물개는 유니클로를 자주 입었거든?! 민트색린넨셔츠에 하얀 반바지. 그리고 깨끗한 하얀 운동화. 등에는 연회색 백팩. 매표를 하는 그 애를 멀리서 쳐다보던 게 기억나.  그 애랑 더 가까워지고 싶었어.


착하고 조용한 얼굴이 생각나. 지금도 그런 얼굴이려나. 많이 늙었겠지? 난 가끔 거울 볼 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 많이 늙은 것 같다 싶다가도 어떨 땐 또 그대로인 것 같아.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어릴 때 얼굴도 보여. 나도 아이를 낳으면 어떨까. 자기 어릴 때가 그리워 아이를 낳는 엄마도 있을까. 이런 이상한 생각도 하고. 특히 옷을 벗고 귀걸이나 목걸이 같은 것도 하지 않았을 때 말야. 난 별로 안 변한 것 같은데 세상은 언제 이렇게나 변했나 싶을 때가 있어. 네가 와줬으면 좋겠어. 와서 내가 변했는지 그대론지 말해주면 좋겠어. 네 말이면 무조건 믿을텐데. 너랑 예전처럼 아무 생각 없이 목욕탕이나 수영장 같은 델 가고 싶어. 화장하지 않은 얼굴을 맞대고 웃던 날들이 많이 그리워.


열여덟 살 때 처음 좋아해 본 남자애랑 영화를 봤을 땐, 영화 내용에 하나도 집중이 안 됐거든. 근데 그날 난, 물개한테 처음으로 정말 집중했거든?! 근데 또 영화도 편하게 재밌게 봤어. 나 플라워 레슨 받다가 레몬색 버터플라이가 너무 이뻐서 나도 모르게 그 잎을 입에 넣어서 삼켜 버린 적이 있었거든? 그날 물개를 보는 느낌이 그랬어. 얘랑 앞으로 어떻게 지내게 될까, 얘는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생각은 하나도 안 하고, 그냥 내 마음만 생각하는 느낌?! 걔한테 그렇게나 집중을 하는데도 말야. 특이한 기분이었어.


우리 동네에 '닭발의 천국' 알지? 너랑도 몇 번 갔었잖아. 너만큼 나랑 식성 비슷한 애도 없었는데. 너랑 그집 가서 예전처럼 소주나 한 잔 깔 수 있음 얼마나 좋을까. 물개도 나도 그날은 이상하게 아는 동생 아는 누나가 아닌 것 같았어. 묘한 긴장감이 돌았어. 기분 좋은 긴장감.


닭발 좋아해?

응.

여자랑 닭발 먹어 봤어?

아니. 처음이야. 누나는?


걔 표정이 갑자기 진지해지길래 난 그냥 웃었어. 그 집 아직도 가는데 난 그 날이 젤 맛있었어.


내가 완전 좋아하는 닭발집이라고, 진짜 맛있어서 지금까지 사귄 애인들은 다 데려왔다고, 근데 넌 애인은 아니지만 특별히 이뻐서 데려온 거라고, 좋은데이를 따서 따라주며 말했어. 헤헤거리던 물개 표정이 또 갑자기 진지해졌을 때 닭발이 나왔어. 늘 같이 시키던 조개탕도.


물개는 닭발을 많이 안 먹어 본 것 같더라구. 내가 좀 설명해줬지. 내가 먹는 대로 먹어 보라구.


일단, 입 속에 살짝 넣어서 발이랑 발가락 부분을 끊어. 그리고 발가락은 이렇게 놔두고, 발? 발목? 여기가 발인지 발목인지 모르겠네. 암튼 이 굵은 부분부터 발라 먹구, 이걸 다 먹었잖아? 그럼 발가락을 또 반으로 끊어. 그럼 두개랑 하나로 일케 갈라지잖아. 그럼 한쪽은 두고 또 한쪽부터 먹는 거야. 그리고 나머지를 먹어. 이렇게 먹으면 비닐 장갑 안껴도 되잖아. 어떼? 좀 싸패 같을 수도 있는데, 난 이상하게 닭발 먹으면 이렇게 뚝뚝 끊어질 때 식감이 좋아. 왠지 모를 쾌감이 느껴져. 잔인하지? 큭크크


라고 설명하고는 소주를 한 잔 들이켰지.


와 누나 어쩜 이리 맛있게 먹어?


하면서 잔을 짠 하고 맞춰주던 게 생각나.


닭발이 입 속에서 뚝뚝 끊길 때의 쾌감. 거기 발린 양념을 쪽쪽 빨아먹었을 때의 짭짭하고 고소한 맛. 그것들의 여운이 입 속에 가득할 때 들이키는 소주 맛이란. 빨간 양념장에 번들번들하던 닭발. 그걸 쪽쪽 빨아서 발라 먹고 있던 물개 입술이 빨갰어.  반투명한 조개탕 국물 속에 가득하던 바지락이랑 홍합. 조명에 일렁거리는 국물을 따라 나도 일렁거렸어. 술맛이 좋아 과음했었지. 물개는 내가 가르쳐준 대로 닭발을 얼마나 이쁘게 먹던지. 지금도 아마 걘 닭발 먹으면 내 생각 할 거야. 그건 확실해.


누난 이거 누구한테 배웠는데?

나? 난 그냥 내 맘대로 먹다보니 이렇게 되던데.


뭐 이런 얘기를 하면서 깔깔 거리던 게 생각나.



복숭아 냄새


여름 밤에 나는 냄새 알아? 해질 때 쯤부터 새벽 될 때까지 나는 시원하고 두근거리는 냄새. 낮에는 안 나는 냄샌데, 난 그 냄새를 맡으면 혼자있기가 싫어져. 그 냄새랑 그 기분을 아는 사람은 아직까지 못 만난 것 같애. 음,,, 이해하려고 진심으로 애를 썼던 사람은 태오? 땀이 별로 없는 내 옆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서도 계속 손을 잡아주던 태오까지 생각나서 그날은 너무 외롭더라. 뭐하러 헤어졌나, 또 이렇게 똑같이 살 거면서 싶기도 하고. 닭발집에서부터 시작해서 내 오피스텔까지 쭈욱 걸었어. 내가 그런 걸 걔도 느꼈을까? 물개가 처음으로 내 손을 잡았어. 그러다가 집 가까이 와서는 팔로 어깨를 감쌌어. 태오 생각까지 했는데도 그 날은 혼자 있고 싶지가 않았어.  물개랑 좀 더 같이 있고 싶더라구. 그러고 싶은데 그럴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겠지? 엘리베이터에서 오랫동안 걔를 쳐다봤어. 어깨에 닿은 팔이 뜨거웠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말했지.


맥주 한 잔 하고 갈래?

어,,어디서?

우리 집에서! 

진짜?


비밀의 문이라도 열린 것처럼 환하게, 숨기지 못하고 활짝 웃어보이며 흔쾌하던 물개 표정을 잊을 수 없어. 익지 않은 존재들은 그렇게 투명한 걸까.


신축오피스텔이라 그런지 조명이 그럴듯했어. 간접등만 켜서 집 전체를 아늑하게 만들고 물개를 앉혀 놓고 맥주랑 맥줏잔을 꺼냈어. 호가든이었던 것 같아. 부드럽고 상큼한. 라거는 남자 같고 에일은 여자 같다는 생각은 아직도 그래. 난 지금도 에일만 먹어.


난 라거가 좋은데? 그건 안 겹치네?


하고 처음 보는 표정을 짓던 네 얼굴이 생각 나네.


특별한 안줏 거리가 없어서 복숭아를 꺼냈어. 내가 여름에 자주 복숭아 사 놓는 거 너도 알지? 말랑말랑하게 익은 황도였는데, 얼마나 익었는지 깎기 전부터 냄새가 퍼졌어. 복숭아 냄샐 맡으니 기분이 무지 좋아지더라. 복잡한 것들이 순식간에 단순해질 때가 있잖아? 내 머릿 속은 순식간에 복숭아 냄새랑 물개만으로 가득해졌어. 깎고 있는데 복숭아 과즙이 손가락을 타고 손목까지 줄줄 흘러내렸어. 손을 다 씻었는데도 자꾸자꾸 냄새가 나더라. 맥주를 마시면서 물개랑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나. 스르릅하고 베어 물면 입 안에서 퍼지던 복숭아 냄새. 복숭아를 먹는다기 보단, 복숭아 냄새를 삼키는 것 같은 기분. 그때를 떠올리면 버터플라이 꽃잎을 삼켰던 장면이 늘 같이 생각 나. 복숭아 냄새를 삼킬 때마다 물개의 시선이 느껴졌어. 다른 날보다 더 꼼꼼하게 내 얼굴에 걔 시선이 닿았는데, 그 느낌이 좋았어. 하나도 부끄럽지가  않았어.


그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멈추고


누나


하고 시선 대신 그애의 얼굴이 내 얼굴 가까이 올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 시간이 참 천천히 갔었는데도 이상하게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 그 애와 나 사이의 촘촘한 공기를 복숭아 냄새랑 같이 꿀꺽꿀꺽 삼키고 있는 느낌이었어.


그런 걸 내가 다시 삼킬 수 있을까?






*다음 편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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