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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Sep 04. 2021

부조(浮彫)와 환조(丸彫)






아내와 손을 잡고 걷고 있다. 꼭 연애할 때 같은 기분이다. 사방이 꽃이다. 선명한 봄. 아내는 평소와 다르게 꽃을 뚝 꺾더니 귀에 꽂는다. 의외로 어울린다. 저렇게 화려한 색이 아내의 몸에 붙었던 적이 있었나. 이 정도면 서라보다 관능적인데? 아내가 다시 보인다. 나는 좀 어지럽다. 아내가 옷을 한 겹씩 벗기 시작한다. 브래지어까지 벗은 아내의 속살이 창백하다. 그 위로 빨간 양귀비 꽃잎이 날린다. 붉은 빛과 향에 알싸해진 나는 아내를 당장 안고 싶어 그녀의 몸을 끌어 당긴다. 야윈 몸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 건지, 상상하지도 못할 완력으로 나를 밀쳐낸다. 그리고 처음 보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웃는다. 쌀쌀해서 소름이 돋는다. 아주 잠깐 그렇게 웃다가 아내가 돌아선다. 갑자기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진다. 눈 앞에 선명하던 아내가 돌아서자마자 사라진다.


"여보! 여보 어디 가! 여보! 인해야!"




"오빠, 오빠! 오빠아!! 오빠 부인 이름이 인해야? 큭크크 무슨 꿈을 그렇게 꿔? 갑자기 소리 질러서 깜짝 놀랐잖아."


며칠째 비슷한 꿈이다. 평소엔 잘 떠올리지도 않는 아내가 왜 자꾸 꿈에 나오는 건지 이유를 모르겠다.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고 누가 일부러 내 꿈을 조작하는 것만 같다. 쳇. 해볼테면 해보라지. 뻔뻔스러운 마음이 되어 서라를 끌어 당겨 안는다. 서라의 큰 가슴이 배에 닿는 느낌이 편안하다. 나는 아래로 내려가 서라의 얼굴을 마주 본다. 서라는 고양이처럼 꼬리가 올라간 눈을 치켜뜬다.


"오빠, 왜 그렇게 크게 인해를 불렀어? 재미없는 마누라 지긋지긋하다더니, 거짓말이었어?"

"다른 사람 같았어. 절대 그럴 리 없는 얼굴. 완전 다른 사람."

"그래? 어뗐어? 원래보다 이뻤어?"

"응."

"헐, 오빠 그럼 난 눈 감구 아현 언니 생각하면서 할테니깐, 오빠는 꿈에서 본 아내 생각하면서 해 봐. 큭크크 어떼?"


서라는 이런 여자다.


서라를 처음 만난 건 병원에서였다. 그녀는 잦은 요통으로 ICT치료를 받으러 주기적으로 내원하는 내 환자였다. 눈에 띄는 얼굴이었다.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었지만, 한번 보면 잘 잊히지 않는 얼굴. 당연히 유부남이어 보일 나에게 과하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그녀를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호기심에서 비롯되는 가벼운 연애에 어느 정도의 대가를 지불할 생각도 있었지만, 서라는 딱히 그런 것에 관심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서라를 생각하면 늘 뒷모습이 떠오른다.  곧고 하얀 목. 15도 정도 아래로 처진 어깨선, 겨드랑이부터 골반까지 이어지는 탄력있는 곡선이 꼭 수학식을 쓸 때의 필기체 엑스 같다고 생각했었다. 실수로 왼쪽 곡선과 오른쪽 곡선을 조금 떨어지게 그린 엑스. 얼핏보면 몸매 좋은 여자의 전형적인 실루엣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서라는 좀 달랐다. 하얀 목 위로 몇 가닥씩 늘 흘러내려와 있는 잔머리, 목선이 끝나고 어깨선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는 검은 점, 등 한가운데에 움푹 파인 척추골, 몸이 닿았을 때의 차갑고 미끈한 촉감. 그런 것들이 나를 독특하게 자극했다.


금요일은 외박을 해도 상관없지만, 토요일은 아들 연우와 같이 시간을 보내라는 아내의 요구에 나는 그대로 응했다. 금요일 밤을 호텔이나 서라의 아파트에서 보내고 토요일 아침에 집에 들어오는 것이다. 오늘 아침은 아내의 얼굴을 좀 자세히 본다. 만약 아내의 얼굴에서 꿈 속의 아내와 비슷한 것을 아주 조금이라도 찾는다면. 그렇다면 어떨까. 계속 이대로 살고 싶은 관성 때문인지 그런 발견이 달갑지 않을 것만 같다. 아내는 정말 아내같은 여자다. 아내가 되기 이전의 아내가 아닌 아내를 나는 잘 모른다. 아내는 우리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주관하는 할머니가 골라 준 여자였다. '보편적인 아내다움'과 '잘나고 금쪽같은 손자의 아내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모두 갖춘 대단한 여자였다. 그리 생각하면 아내가 아내답게 아내로서의 역할을 저토록 잘 해낸다는 것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기도 하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내가 자기 얼굴을 너무 오랫동안 보고 있는 게 이상했는지 아내는 이렇게 묻는다. 다행이다. 지금 아내의 얼굴에서 꿈에 나온 아내는 전혀 찾을 수 없다.


아내와 선을 보고 결혼을 준비할 무렵, 나의 지인들이 아내에게 가장 많이 한 평은  '참하다'는 말이었다.  아내는 그렇게 생겼다. 아주 짧은 연애 기간과 신혼. 그때는 나도 아내가 궁금해서 종종 이런 걸 묻곤했다.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는 비밀 같은 거 있어?"

"당신은 내 어떤 점이 좋아?"


원래도 말이 없는 아내는, 이런 내 질문을 어려워 했다. 말할 것이 정말 없는 건지, 있는 데 표현이 어려운 건지, 표현도 할 수 있는데 그저 부끄러운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피상적인 대화를 오히려 편히 여겼다. 몸도 마음도 뻣뻣해서 잘 열리지 않는 아내가 답답했다. 하지만 십 년이 넘는 긴 세월이 열리지 않는 아내를 열었다. 안에 무언가 있을 것 같아 겨우겨우 열어 본 지하 창고는 텅 비어 있었다. 안 열리는 게 아니고, 연 것이나 열지 않은 것이나 다르지 않은. 투명하다면 투명한. 아내는 그런 여자였다.


착하고 순했다. 적당히 예쁘고 적당히 밝았다. 센스가 있어 요리를 잘 했고, 집을 잘 꾸몄다. 유아교육을 전공한 것 답게 육아에도 능했다. 부지런하고 체력이 좋아 많은 가족행사를 기획하고 추진했다. 연우 방학에 맞추어 유럽 여행을 가고, 연휴가 낀 주말에는 캠핑을 갔다. 결혼기념일이 되면 고맙고 사랑한다는 카드를 써 내게 선물을 주었고, 자기 삶에 굉장히 만족한다는 표정의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기도 했다.


아내는 늘 자연스럽게 굴었지만, 나는 껄끄러웠다. 아내는 내게 늘 친절했지만, 나는 종종 그녀가 못마땅했다. 겉으로 도는 이유를 아내 탓으로 돌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서라 같은 여자가 필요했다. 무언가를 감추고 있을 것 같은, 가슴보다 등이 더 자극적인 여자. 아내를 단념하고 만난 여자들은 대부분 서라 같은 부류였다. 시덥잖은 인생 고민을 들어주며 대학생 여자애를 만나기도 했고, 기구한 사연이 가득할 것 같은 가난한 바텐더를 만나기도 했다. 말이 잘 통했지만 결혼까진 어려웠던 학부 때의 절친과 진한 연애를 즐기기도 했고, 멀리 여행을 갈 때는 두 명의 매춘부를 끼고 호텔방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나는 '독특한 관능을 향유하고 싶은 내가 지나치게 평범한 아내를 만나 재미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내에 대해서 부끄러움이나 죄책감보다는 늘 우월감이나 자만심 같은 걸 가지고 있었다. 아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언제나처럼 토요일에 외출을 하고 돌아온 아내가 갑자기 서재로 들어왔다. 그 시간에 내가 늘 서재에 있다는 걸 아내는 알고 있다. 아내가 저토록 범상치 않은 표정으로 내게 대화를 요청한 건 처음이었다. 나는 긴장했다.


"당신 금요일 밤마다 어디 가는지 나 다 알고 있어."

"......"


남편의 외도를 알아 챈 여자치고 아내는 지나치게 담담했다. 재미없고 참하기만 한 여자이긴 했지만 냉소적이거나 무심하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나는 내 부정이 표면에 드러났다는 사실보다, 아내의 그런 태도가 더 놀라웠다. 하지만 잔뜩 가라앉아 전혀 격앙되지 않은 분위기 때문에 사과나 변명을 하기도 무색해진 나는, 덩달아 차분해졌다.


"이혼하는 거 어떼? 당신도 그렇게 사는데 나 혼자 원하지도 않는 거에 애쓰고 그러기 싫어. 당신이 젠틀하게 챙겨줄 부분 챙겨주고 양육권까지 양보하면, 당신 그 여자랑 그러고 다닌 거 문제삼지 않을게. 그냥 합의로 해. 오래 생각했어. 난 마음 안 바꿀 거야. 싸우고 싶지도 않고. 우리가 그럴 사이는 아니잖아? 잘 생각해 보고 말해줘. "


남 몰래 비행을 일삼던 고등학생이, 막상 어른이 되어 그 모든 비행이 용인되면 싱거워지는 것처럼 나는 좀 망연했다. 다른 사람 같은 아내의 태도도 섬뜩했다. 차라리 처음에 저런 단호한 모습이었다면, 나는 아내를 좀 다르게 대했을까. 다음 날부터 아내는 배역이 끝난 배우처럼 굴었다. 외도를 하는 남편에게 충격을 받거나 실망을 해서 하는 행동이라고 보기엔 어딘지 좀 과한 면이 있었다. 아내는 내게 처음 보이는 얼굴로 웃기도 했다. 그 웃음이 행복해 보여 소름이 돋았다. 그 전까지의 웃음은 모두 연기였다는 걸 한눈에 보여주는 그런 웃음. 도대체 그 동안의 아내는 무엇이었단 말인가. 나는 억울하기도 허망하기도 해서, 이 모든 걸 멈추고 어디 도망이라도 가고 싶어졌지만 그럴 수 없었다. 겉보기에 우리의 문제는 모두 내가 자초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모든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혼 과정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가족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과정이 번거롭고 어렵긴 했지만 그런 것들도 결국은 다 지나갔다. 우리 사이에는 거의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집 안에 가득한 무심함과 허망함 중 각자 자기 것을 챙겨서 떠나면 모든 게 끝이었다.




시간이 꽤 흘러,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은 지도 두어 달이 지났다. 그 동안 자잘하게 정리할 것들도 모두 정리되었다. 그 과정에 제동을 걸고 싶진 않았기에 아내에게 묻지 않은 것이 있었다. 직장을 그만둔 사람처럼 구는 아내에게 구차한 질문 같은 걸 하고 싶지 않았다. 혹여 예상치 못한 아내의 대답으로 내가 흔들린다면, 그조차 머쓱할 것만 같았다. 나는 그 동안 아내가 좀 무서워졌다. 이제 모든 게 끝났으니, 그냥 나도 무심한 척 그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동안 고맙고 미안했어. 약속한 것들은 충실히 해 줄게. 연우를 위해서라도. 근데 혹시 당신도 만나는 남자 있는 거야? 걸고 넘어지려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대답하기 어려우면 대답 안해도 돼.


사실 너무나도 대답을 듣고 싶었지만, 아내가 만든 우리 사이의 무심한 기조를 깨뜨리기가 겁났다. 얼굴을 보거나 전화를 걸어 물어보기도 좀 그래서 문자를 보냈다. 생각보다 빠르게 아내에게서 답장이 온다. 글자가 아닌 사진이다.


거울 속 아내의 사진이다. 아내는...아내는......아무 것도 입지 않은 어깨로 어떤 여자를 안고 웃고 있다. 이혼을 말하고 처음 봤던 그 낯선 얼굴을 하고. 아내에게 안긴 여자의 등. 역시나 아무 것도 입지 않은 그 등은...그 등은......머리카락이 몇 올 흘러내린 하얗고 곧은 목에서 시작된다. 벌어진 필기체 엑스자를 닮은, 척추가 있는 부분이 움푹 패인 그 등이다. 나는 사진을 키워 목선과 어깨선이 만나는 지점의 점을 찾으려 하지만, 그 부분은 아내의 손으로 가려져 있다. 매끈하고 하얀 등이 조명을 받아 번들거린다.




양귀비가 흐드러지던 그 꽃밭이다. 여전히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걷고 있다. 그때처럼 아내가 꽃을 꺾는다. 한 송이가 아닌 한 웅큼을.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아내의 젖가슴이 빨간 양귀비로 가려진다. 내 손을 놓고 아내가 뒤돌아서 걸어간다. 처음으로 아내의 등이 보인다. 야윈 아내의 등이 서서히 서라의 등으로 바뀐다.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진다. 아내가 보내줬던 사진 속의 그 방 같다. 내 등 뒤에 거울이 있을 것 같다. 서라를 안은 아내가 무섭게 웃고 있다. 나는 내 등 뒤를 보고 싶어 고개를 뒤로 돌린다. 거울 속에는 등이 없는 내 얼굴만 둥둥 떠 있다. 그리고 저 멀리서 아내가 내게 보여주려는 듯, 서라의 목에서 손을 뗀다. 목선과 어깨선이 만나는 그 지점에 검은 점이 선명하게 보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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