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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Aug 22. 2021

무한 켤레의 구두

필수 씨에게





깜짝 놀라셨죠? 갑자기 사라져서 미안해요. 저도 저를 어쩔 수 없었어요. 필수 씨 얼굴을 보고는 차마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좀 비겁한 방법을 쓰기로 했어요. 저 원래 좀 이런 여자예요. 싫으면 일단 도망부터 가거든요.


우선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저처럼 별볼일도 없으면서 싸가지 없는 애를 좋아해줘서요. 화가 머리끝까지 나셨죠? 감지덕지하고 필수 씨의 프로포즈를 받아야 하는 처지인데, 감히 이런 짓을 벌이다니요.


그래요. 저는 필수 씨가 생각하듯, 쥐뿔도 없으면서 허파에 바람만 잔뜩 든 여자일지도 몰라요. 저도 필수 씨가 싫기만 한 건 아니었어요. 필수 씨 집에 누워있으면 인생 거저먹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데이트할 때마다 먹는 음식들은 왜그리 또 맛있는지. 종종 존경심이 들기도 했어요. 필수 씨는 어쩜 그렇게 인생을 부드럽게 잘  살아요? 어디서 배우고 오셨어요? 필수 씨가 사는 걸 보면요, 꼭 잘 짜여진 코스 요리 같아요. 너무 너무 우아하죠. 식전빵 다음엔 에피타이저, 그 다음엔 샐러드, 그 다음엔 메인, 그리고 디저트에 에스프레소까지. 전 자주 못 먹어서 순서도 헷갈리네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인생을 진행시킬 수 있다는 게, 그렇게 삐져나온 부분 없이 가지런하다는 게 저로써는 감격입니다. 그래서 저도 잘 차려진 필수 씨 밥상에 숟가락이나 얹고 우아하게 짐을 풀어볼까 궁리도 해 봤죠.


사실 제가 사는 집은 형편없어요. 사실은 좀 쪽팔리기도 해서, "라면 먹고 갈래요?" 이런 말도 못해봤어요. 필수 씨한테 멸시 받고 싶진 않거든요. 깜짝 놀랄 거예요. 밤에는 바퀴벌레도 나와요. 창틀에는 먼지가 가득하고, 화장실에는 곰팡이도 있어요. 쇼파가 있긴한데, 낡아서 찢어진 데가 많아요. 필수 씨가 상상하는 것보다 저는 더 게을러서 코딱지 만한 씽크대에는 설거짓거리가 잔뜩 쌓여있어요. 보시면 기겁할껄요? 이런 편지를 쓰고 도망치는 것보다 필수 씨를 우리 집에 데려오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인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네요.



근데 딱 한 군데. 거기만큼은 활짝 열어서 당당하게 보여주고 싶기도 해요. 바로 신발장. 만약 필수 씨랑 결혼했다면, 신발장은 그 안에 내용물까지 그대로 가지고 갔을 거예요. 저는 사실 남자를 만날 때마다 신발을 한 켤레 씩 선물 받았어요. 필수 씨도 그랬잖아요. 저한테. 옷보다 신발이 더 많겠다구요. 세어보진 않았지만 수십 켤레의 신발이 내 커다란 신발장 안에 있어요. 집안엔 먼지가 가득한데, 신발장 안에는 먼지가 한 톨도 없어요. 하나하나 다 꺼내서 설명해주고 싶지만, 뭐 사실 우리가 다시 볼 사이도 아니고. 제가 아끼는 몇 켤레만 이야기해 드릴게요. 다 얘기 해봤자 필수 씨가 뭘 알겠어요? 필수 씨는 몰라요. 옷보다 신발이 더 중요한 사람의 마음을요.


제가 신을 때마다 깨끗하게 빨아서 넣어두는 하얀색 운동화. 이건 고등학교 때 만났던 윤우가 선물해 줬어요. 자세히 보면 싸구려 티가 나긴 하지만, 가벼워서 요즘도 가끔 신고 나가요. 너처럼 발목이 하얗고 가느다란 애한테는 이런 운동화가 잘 어울린다면서 하얀색 상자에 담아서 윤우가 줬거든요. 걔랑 이 운동화 신고 참 자주 잔디를 밟았어요. 연두색 잔디 위에 하얀색 운동화를 얌전히 벗어 놓고 윤우 허벅지를 베고 한참 누워있기도 했구요. 그때 하늘이 참 이뻤어요.


버건디 하이힐은 동훈이가 준 거예요. 같이 신발 가게 구경하다가 즉흥적으로. 신기하게 딱 한 켤레가 남아있었는데, 제 발에 딱 맞더라구요. 동훈이는 우리 집에 자주 데려 왔어요. 걔가 끓인 라면이 기가 막혔죠. 근데 동훈이가 기가 막힌 건 라면보다 노래였어요. 걘 꼭 섹스하고 나면 노래를 불러줬거든요. 딱딱한 동훈이 팔뚝을 베고 걔 노랫 소리를 들을 때가 젤 행복했어요. 조금씩 흘러 나오는 담배 냄새랑 까슬까슬한 목소리가 참 잘 어울렸어요. 전 사실 담배 냄새를 싫어하는데, 신기하죠? 저는 노래하는 동훈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걔를 꽉 안았어요. 그러면 걔는 더더 꽉 절 안아줬어요. 꽉 안아 손끝 발끝까지 딱 붙은 두 개의 알몸일 때가 참 좋았어요. 아무 생각이 안났거든요.


토슈즈처럼 생긴 연보라색 플랫 슈즈는 태오 오빠가 서른 살 생일 선물로 준 거예요. 태오 오빠는 목련 같은 남자였어요. 벚꽃 피기 전에 목련부터 피는 거 알죠? 전 목련 보면 아 이제 봄이구나 안 추워도 되구나 곧 다른 꽃들도 피고 내가 젤 좋아하는 여름이 오겠구나. 이런 생각하거든요. 태오 오빠를 보면 이상하게 겨울인데도 목련을 보는 것 같았어요. 절 보는 눈빛이 늘 폭신폭신했죠. 한번은 쌀쌀할 때 맨발에 연보라색 플랫 슈즈를 신고 나가 걷다가 발이 꽁꽁 얼어버린 적이 있거든요. 발이 시려워 못 걷겠다고 했더니, 태오 오빠가 벤치에 저를 앉히고 커다랗고 따뜻한 손으로 제 발을 데워줬어요. 그날은 업혀서 집까지 갔어요. 포옹보다 업히는 게 더 좋았어요.


아마 이까지 읽었으면 필수 씨가 저를 충분히 단념할거라 생각해요. 저를 미친년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어요. 제가 누구인지는 아직까지 잘 모르시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잘 이해하기를 바라구요.


필수 씨에게 받았던 비싼 것들은 다 돌려드릴게요. 저한텐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는 것들이지만, 필수 씨한텐 중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 정도 배려는 해 드릴게요. 근데 필수 씨가 지난 주에 주신 하얀 색 웨딩슈즈. 그건 버렸어요. 그건 꼭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었어요. 죄송해요.


잘 짜인 각본처럼 흠 없는 필수 씨의 인생이 평화로이 흘러가기를 기도할게요. 저는 그 각본의 흠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저는 각본처럼 지어낸 존재가 아니에요. 각본 같은 건 이제 멀리할 계획입니다. 물론 사는 게 계획대로 되지는 않겠지만요. 지금 이 편지도 사실은 계획하지 않은 애드립이거든요. 아무 생각 없이 거리를 걷다가 떡볶이를 먹고, 떡볶이 국물을 하얀색 셔츠에 흘리고, 갑자기 내리는 빗물에 그 국물이 씻겨 내려갈 때. 그럴 때 기분이 어떤지 필수 씨는 잘 모를 거예요.


뭐 각본이고 진실이고 간에, 한 켤레의 구두만으로 살아가기엔 인생이 너무 길어요. 게다가 하얀 색이라니 저한테 어울리지도 않을 뿐더러, 제 성격에 하루만 신어도 더러워질 거예요.


새 여자에겐 새 구두를 사 주세요. 저는 당분간 맨발로 다녀도 되는 나라에서 지낼 생각이에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끝-




*이미지 출처: 자라 공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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